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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일기] ⑤ 공중목욕탕에서의 깨달음

중앙일보 2016.03.26 00:53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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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몸을 잘 돌보아, 거기 네 영혼이 기쁘게 거하도록 하라.” 서울에서 그 말씀을 제대로 실천할 최적의 장소가 바로 공중목욕탕이다. 나를 치유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그곳을 찾을 때마다 내 마음은 감사와 즐거움으로 마냥 들뜬다.

사장인지 직원인지 알 수 없는 목욕탕 ­… 겉치레 벗어던져야 행복해져요

유럽인에게 그곳은 단연 특별하고 독특한 세계다. 처음 거기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천진난만함이 내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불편한 기색이랄지 콤플렉스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몸을 꼼꼼히 문지르고 씻어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나는 그 어떤 영적 수행 과정에서보다 소중한 진리를 깨칠 수 있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몸과 마음부터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체의 꼬리표가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누가 사장이고 누가 직원인지 알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는 자취를 감추고 인간 자체만 남아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마다 맡은 역할을 다하느라 치른 고생을 생각해보면,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자유와 풍요의 공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를 너무 성급하게 규정해온 온갖 역할과 기능, 겉치레를 훌렁 벗어던지는 것이 곧 수행(修行)임을 그 순간 깨닫게 된다.

몸을 돌본다는 건 삶의 악기가 연주하는 음악에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악기를 우리가 잠시 빌렸을 뿐이며, 그만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칠 경우 몸 자체를 우상처럼 받들 위험성도 분명 존재하며, 반대로 거북한 짐짝처럼 취급하거나 플라톤이 그랬듯 일종의 무덤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공중목욕탕에서 내가 깨달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든 지금 있는 그곳에 꿋꿋이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유리된 채 멘털(mental)에 사로잡힌 삶을 사느라 죽도록 고생하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삶과 살아 숨 쉬는 이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만의 드라마를 찍느라 평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알다시피 나는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 점을 끊임없이 내게 상기시켜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나는 그런 나의 몸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삶 전체를 온전히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과제다.

아들 오귀스탱과 공중목욕탕을 찾을 때 종종 하는 놀이가 거기서 제일 편안해 보이는 아저씨를 서로 지목하는 것이다. 하루는 녀석이 아주 천천히 걷고 동작이 느린 할아버지 한 분을 골랐는데 제법 그럴 듯한 안목이었다. 순간 몸이 성치 않은 내게 든 생각. ‘그렇지,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운동선수처럼 몸이 좋을 필요는 없지’. 문제는 어떤 정신 자세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느냐다. 우선 너무 꼭 끼는 옷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는 비교 욕심부터 벗어던지는 것은 어떤가. 툭하면 남과 비교하는 반사적인 버릇은 그 결과가 만족이든 불만족이든 나 자신을 황폐화시킬 따름이다.

결국 행복이란 무언가를 더 껴입고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벗어던지고 내려놓음으로써 가벼워지는 어떤 느낌이다. 영혼이 기쁘게 머물 수 있도록 몸을 잘 돌보는 것, 이웃에게 보다 더 온화해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애정으로 보듬는 것은 각박한 탐욕과 에고이즘, 정서결핍에 매몰되기 쉬운 현대인의 시급한 책무다. 인간은 결핍과 상실을 통해서는 결코 홀가분해질 수 없으며 기쁨 속에서만 자유로워진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옳았다. 만사가 힘들어질수록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찾는 일은 우리에게 희망보다 더 절실한 의무다.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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