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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의 시시각각] 김무성은 왜 영도다리에 섰나

중앙일보 2016.03.26 00:01 종합 2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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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논설위원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까움은 짙은 해무(海霧)에 숨어 있었다.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해무가 채워놓은 것 같았다. 물리적 계산은 무의미했다. “안개는 언제쯤 사라질까.” 가까이 있는 이가 나의 사랑인지, 멀리 있는 이가 나의 미움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해무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존재들은 또 다른 형태의 종과 열로 나타날 것이다. 해무는 가랑비를 반기며 서서히 걷혔다. 해무가 사라진 바다 위에는 군상들이 또렷한 모습으로 허옇게 이빨을 드러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부산 영도 지역구 사무실을 지나며 영도다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승용차는 서울발 비행기가 있는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아침 해무는 꼬리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화물차 바퀴 같은 검은색 고무 튜브를 몸에 끼우고 물놀이를 하던 옛적 아이들 모습이 상념의 바다를 헤치고 들어왔다. “우리 중 누가 제일 빨리 갈 수 있을까.” 바다 중간쯤에 떠 있는 낡은 뗏목이 목적지였다.

“가장 쎄게 헤엄치는 놈이 이기는거제. 하하.” “임마 뭐라카노….”

1934년 11월. “무릇 부산항은 조선반도의 인후(咽喉)이자 구아(歐亞) 연락의 현관으로 교통 무역상 매우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케다 경무국장이 영도다리 준공식에서 총독의 축사를 대독했다. 일제의 군비 확장과 관련해 영도의 물품들은 영도다리와 부산역을 거쳐 만주로 향했다. 6·25와 함께 영도다리는 또 한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흥남부두에서 내려와 가족을 찾아 헤매다 쓸쓸히 쓰러져간 금순이와 ‘오빠!’ 하며 환호성을 질렀던 꽃분이가 다리의 주인공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영도다리는 어두웠다. 인근 조선소에선 투쟁의 깃발이 올라왔다.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서민들이 생겨났다. 부마 항쟁 때 조명이 없는 다리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품으로 안았다. 인근 수사기관 조사실의 불빛은 어군 탐지기처럼 어둠을 훑고 지나갔다.

치열했던 삶과 허무한 죽음이 교차했던 영도다리에 김무성이 섰다.

‘30시간의 법칙’이란 세간의 조롱이 가슴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바다 바람은 청량했다. “약점이 많아서 저러다 말거야”라는 수군거림이 환청으로 내려앉았다. 1년8개월 전인 2014년 7월 당 대표로 취임한 이후의 정치적 풍랑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왔다. 137억여원의 재산신고 내역을 둘러싼 뒷말과 사위가 연루됐던 마약사건, 딸의 모발검사와 대학교수 사퇴…. 존재는 가벼움이 아닌 비천함으로 영도다리 밑에서 파도로 일렁였다.

서울 여의도 당사에는 날 선 말들이 튀어나왔다. “무책임의 극치다. ” “선거를 책임져야 할 당 대표라는 사람이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율사 출신들이 당헌 당규를 뒤적이며 법리적 문제점을 찾았다. 당헌 30조에 대한 유권해석이 분분했다. “대표 최고위원이 사고·해외출장 등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원내대표·최고위원 중 최고위원 선거 득표 순으로 그 직무를 대행한다.” 당헌 조문 중 ‘등(等)’이란 단어는 친박 인사들에겐 한 줄기 빛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회가 갈등하고 국론이 분열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옥새 투쟁’의 배경이 된 영도다리는 또 하나의 정치적 현장이란 기록을 갖게 됐다. 2013년부터 다리의 중간 부분을 들어올리는 이벤트를 복원하면서 관광객들의 인기를 얻었다. 김무성이 영도다리에 섰던 날에도 인파가 몰렸었다. 다리 밑 바다에는 물고기를 잡아 먹으려는 갈매기들의 자맥질이 계속됐다. 몇몇 갈매기는 머리를 꺾은 채 접안지역으로 떠밀려 나왔다.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머리를 돌린 것은 이미 죽은 새다.” 부산 낚시꾼들에게 익히 알려진 말이다. 돌이킬 수 없는 항로를 택한 김무성은 옥새파동 이후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고개를 꺾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절반의 어정쩡한 모습일까.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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