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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문학] 결국은 모두 만각의 생

중앙일보 2016.03.26 00:01 종합 2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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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황석영은 1970~80년대에 발표한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들로 ‘한국문학사’의 한 챕터를 완성했고, 89년에는 방북(訪北)해 ‘북한문학사’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98년 석방 이후 글쓰기로 복귀한 뒤에는 원숙한 장편소설을 쓰고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해 ‘세계문학사’에 참여하고 있다. 삶과 문학과 공동체, 세 층위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다 보니 남한과 북한과 세계를 다 살아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한 한국 작가는 지금까지도 한 사람뿐이다.

황석영 단편소설 ‘만각 스님’


출소 이후 그의 장편소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오래된 정원』(2000), 『손님』(2001), 『심청, 연꽃의 길』(2003), 『바리데기』(2007), 『개밥바라기별』(2008), 『강남몽』(2010), 『낯익은 세상』(2011), 『여울물소리』(2012), 『해질 무렵』(2015). 내가 특히 좋아하는 소설은 맨 앞의 두 편과 최근 두 편이다. 부분적으로는 맑고 전체적으로는 깊은, 거장의 작품이다. 그가 최근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호에 28년 만에 단편소설 ‘만각 스님’을 발표해 반갑게 읽었다. 역시나 맑고 깊었다.

광주학살의 충격 속에 있었던 83년의 어느 날, 소설가인 ‘나’는 10년 동안 끌어온 소설 연재를 어떻게든 마무리하기 위해 담양의 호국사에 몸을 의탁하는데 거기서 만각 스님을 만난다. 만각(晩覺), 그러니까 늦깎이라는 것. ‘나’는 그를 내심 얕잡아 본다. 이 절터가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였던 터라 혼령이 자주 출몰하는데 거개가 빨치산이더라는 것, 그래서 그날 이후 만각이 현충일 다음 날 별도의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마음을 다 열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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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만에 단편소설 ‘만각 스님’을 발표한 황석영.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를 돌아본다. [중앙포토]


그런데 ‘나’가 절을 찾은 객승과 시비를 벌였을 때 이에 대처하는 만각을 보면서, 또 그가 두 아내를 잃고 세 아이를 길렀다는 것과 과거에 공비를 토벌한 경찰이었으나 이와 같이 회심했다는 것과 사형수의 딸을 데려와 연민에 못 견뎌 하며 키우고 있다는 것 등의 사연을 들으면서 비로소 ‘나’의 마음이 열린다. 마지막 문장이다. “나는 스님의 법명이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디 그이뿐이랴. 사람살이란 언제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의 반복이 아니던가.” 결국은 모두 ‘만각의 생’을 산다.

살아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다. 인생의 다음 단계를 예습하는 방법은 없으며, 회한 없이는 할 수 없는 복습이 대체로 인간의 일일 것이다. 이렇게 삶은 겨우 겸허해지는 것인데 이 마음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어떤 의례에 몸을 얽매는 것도 할 만한 일인가 싶다. 만각 스님처럼 말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상을 견디는 일이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처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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