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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⑧ 아이슬란드의 터줏대감, 북극여우를 만나다

중앙일보 2016.03.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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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는 사람이 작아지는 땅이다. 양이 사람보다 많고, 자동차보다 달리는 말을 보기가 더 쉽다. 이곳에서 풍경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고 동물이다. 그렇다 보니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동물에게 향한다.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처럼, 때로는 동물과 뜻깊은 인연을 맺기도 한다. 북극여우와의 만남이 그랬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슬란드의 야생동물 하면 북극곰을 떠올린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북극곰이 살 수 없다. 섬의 북쪽에서 이따금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그린란드에서 쪼개져 나온 유빙을 타고 떠내려온 북극곰이다. 아이슬란드의 토종 야생 포유류로는 북극여우가 유일하다. 바이킹이 정착하기 전부터 이 척박한 땅을 이겨내고 뿌리내린 녀석들이니, 아이슬란드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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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여우를 처음 만난 것은 아이슬란드의 최서단으로 향하는 길에서였다. 차에서 잠시 내려 숨을 고르는데 갈대밭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북극여우가 튀어나와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포복 자세를 취한 채 갈대밭에 숨어 한참 동안 북극여우를 기다렸지만, 돌오지 않았다. 이후 북극여우가 시도 때도 없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 녀석이 아닐지라도 북극여우를 꼭 만나고 싶었다. 마침 웨스트피오르 수다빅(Súðavík)이란 마을에 북극여우 센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이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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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빅은 아담하지만 수려한 경관을 지닌 어촌 마을이었다. 눈이 쌓인 산을 등지고 푸른 빛의 바다가 스며드는 곳에 북극여우 센터가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북극여우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과 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인장은 북극여우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아이슬란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북극여우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북극여우 사냥의 역사는 사람이 이 섬에 정착하여 촌락을 형성하기 시작한 약 1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질 좋고 보온이 뛰어난 북극여우의 모피를 얻기 위해 사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철 부족한 먹이를 얻기 위해 북극여우가 마을의 가축을 공격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결국 마을 주민들은 모피가 아닌 가축 보호를 위해 북극여우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아이슬란드에서는 북극여우를 사냥하고 있다고 했다. 모피 값도 많이 떨어졌고 가축이 공격당할 일도 줄었지만 사냥꾼들은 여전히 북극여우를 잡고 있다고 한다.

센터 뒷마당에는 여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름은 잉기와 모리. 사냥꾼에게 부모를 잃고, 굴 안에 남겨져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녀석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형제의 새로운 부모가 되었고, 철제 울타리는 그들의 새로운 집이 되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두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더니 엉덩이를 잡아 뜯고 다리에 매달리고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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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북극여우는 호기심이 많고 친근한 성격을 지녔다고 들었지만 잉기와 모리는 유별났다. 두 녀석과 한참을 뛰어놀았다. 온몸은 잉기와 모리가 묻힌 흙으로 도배되었다. 신발 끈도 뜯기고 장갑 한 짝도 두 녀석에게 빼앗겼다. 떠날 시간이 되었지만 그새 정이 들었는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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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밖에서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잉기와 모리도 나를 바라보았다. 꼬리는 강아지처럼 흔들고 있었지만 눈빛은 야생에 대한 갈망이 가득해 보였다. 북극여우의 천국인 웨스트피오르가 아닌 울타리에서 지내야 하는 형제가 문득 안쓰러웠다. 아마 지금껏 본 동물들의 자유로운 모습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센터를 나와 근처 바닷가를 배회했다. 물개들이 수면 위로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여유롭게 수영을 하고 있었다. 물안개를 머금은 마을의 풍경과 북극여우의 눈망울이 겹쳐 아른거렸다. 언젠가는 잉기와 모리를 자연 속에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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