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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내 접시는 내가 담는다

중앙일보 2016.03.19 00:01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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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내 이럴 줄 알았다. 공짜가 사람 잡는다더니, 공짜 호텔 뷔페 티켓 때문에 약국 신세를 지고 말았다. 평소의 두세 배를 먹었으니 위가 놀랄 만도 하지. 그것도 한식·중식·양식 잡탕으로 말이다. 싱싱한 생선회 및 해산물, 굽고 튀기고 삶고 졸인 각종 고기는 물론 인도식 카레, 베트남식 국수와 중동식 케밥, 향기로운 봄나물과 화려한 색깔의 과일과 달콤한 디저트까지….

“이런 비싼 뷔페에서 본전 뽑으려면 작전이 필요해!”

일행 중 ‘인간 검색창’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초등학생 조카에게 명령하듯 말해준 작전은 이랬다. 첫째, 한 바퀴 돌아볼 것. 어떤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머릿속에 넣어야 한단다. 둘째, 비싼 음식이나 평소에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을 먼저 먹을 것. 셋째, 먹어야 할 게 많으니 한 종류의 양을 최소화할 것. 넷째, 세 접시는 먹어야 하니 될수록 천천히 먹을 것.

이런 미니 강의를 듣고도 내가 첫 접시에 초밥과 튀김을 가지고 왔더니 그런 ‘허접한’ 걸로 배를 불리면 진짜 비싼 회는 어쩔 거냐고 타박을 주었다. 자기 조카가 스파게티를 담는 걸 보고도 질겁하더니 급기야는 “내가 알아서 담아갈 테니까 넌 가서 앉아 있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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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유쾌하게 웃고 떠들긴 했지만 그 친구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기어코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놀란 위를 부여잡고 학교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앉아있으려니 불현듯 뷔페와 인생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중요한 결심을 하기 전에는 자기 앞에 어떤 선택이 놓여 있는지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는 점. 직접경험은 물론 책·영화·여행, 혹은 이런저런 사람들의 조언 등 간접경험을 통해 다양한 인생을 조금씩은 맛볼 수 있다는 점. 그런 과정을 거친 후 눈앞에 놓인 그 많은 선택 중 몇 가지를 골라서 우선순위를 정해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 말이다.

그러나 뷔페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 손으로 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뷔페처럼 인생에서도 자기 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서는 자기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내 친구가 조카에게 그랬듯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다른 사람의 접시까지 채우려 든다. 가장 좋은 것을 담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뷔페에서도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다른 곳은 돌아보지도 마. 음식은 비싸고 영양 풍부한 한우가 최고야. 내가 알아서 담아다 줄 테니 너는 먹기나 해. 알았지?”

나 대신 누군가가 뭘 먹을지 정해주고 심지어 갖다 주기까지 하면 당장은 편해서 좋다. 운 좋게 그게 내가 원하던 음식이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내 경험상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 하고 싶은 일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 때문에 남이 갖다 준 고급 고기 요리가 영양가는 높을지 몰라도 내 입에 맞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내가 고른 게 아니니까 고기가 조금만 짜거나 질겨도 남 탓을 하며 짜증 내게 된다. 내가 언제 이거 먹고 싶다고 했냐고. 그러니 절대, 절대로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평생 남의 탓, 남의 원망을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 학생이 떠오른다. 봄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연구실 밖에 붙여놓은 학생상담 요청 시간표에 제일 먼저 이름을 적었던 학생이다. 덧니를 살짝 보이며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이 친구, 긴장 반 흥분 반으로 발개진 얼굴로 5분도 안 되어 진로에 대한 고민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중·고등학교 6년을 공부만 하다가 원하던 학교에 들어왔지만 지난 2년 내내 뭔가 허전하고 두렵고 짜증이 났단다. 부모님은 교사가 됐으면 하지만 임용고사 보는 것도, 자기처럼 반항적인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칠 자신도 없단다. 벌써 3학년인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목적지는커녕 방향조차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4년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없이 듣는 얘기지만 들을 때마다 나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얼마나 막막하고 절박할까? 내게 저 말을 하려고 또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까?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 없이 산다고 누가 그러는가?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뜨거운 자갈밭을 알몸으로 구르듯 치열하게,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 손끝만 걸고 버티는 듯 처절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다. 장하고도 안쓰럽다. 이들에게 내 조언보다 나랑 만나기 전에 자신의 고민을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서 그걸 털어놓는 과정 자체가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 아니 그러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학생에게 인생이라는 뷔페를 한 바퀴 찬찬히 돌아보라고, 그리고 네 접시는 반드시 네가 고른 걸로 채우라고. 그리하여 네가 가져온 음식, 부디 끝까지 맛있게 먹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음, 이 학생, 다음주에 다시 찾아오라고 할까 보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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