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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째 바둑 배우는 기빈이, 인내심·집중력 늘었어요”

중앙일보 2016.03.17 01:05 종합 2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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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시 잠현초 방과후 바둑교실. 박이든(오른쪽·흑돌)군은 “졌지만 지난주 첫 수업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강정현 기자]


“1년 후 이세돌과 알파고가 다시 바둑을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1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현초등학교 방과후 수업 바둑 시간. 이성근(34) 바둑담당 교사가 전날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설명하며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이세돌이 이겨요. 컴퓨터니까 오류가 날 수 있어요.” 이준혁(7)군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임성우(10)군이 반박했다. “아니에요. 알파고가 이겨요. 통계를 더 많이 분석해 훨씬 강해졌을 거예요.”

[꿈꾸는 목요일] 알파고는 못하는 바둑 인성교육


이 교사가 “알파고와 인간의 차이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라고 다시 묻자 임군은 “컴퓨터는 마음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실수도 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그 옆에 있던 윤성민(7)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대로 사람은 감정이 있어요. 바둑을 하면서 재밌어 할 줄 알아요. 그런데 알파고는 그런 기쁨을 몰라요.”

세 번째 줄에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강기빈(9)군은 “창의성이오. 알파고는 사람이 못하는 엄청난 계산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입력되지 않은 건 알 수 없죠”라고 말했다. 강군은 “알파고를 만든 건 결국 인간”이라며 “다시 대국을 한다면 알파고를 이길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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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업은 한국기원이 개발한 ‘인성바둑’ 프로그램 수업이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 이후 바둑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이 프로그램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현재 서울 지역의 경우 유치원 100여 곳을 비롯해 초등학교에서 이 같은 수업이 진행 중인데 수강 희망자들로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다. 대형마트 등에선 바둑판 등 바둑용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등 바둑이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둑이 두뇌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건 이미 학부모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한국기원 바둑교육아카데미가 지난해 서울 지역 10개 초등학교 1~6학년생 301명을 대상으로 방과후 ‘인성바둑’ 수업 전후를 비교해 봤더니 창의성과 도덕성 등 4개 역량이 모두 크게 향상됐다. 창의성(3.6→3.9점)과 정서성(3.5→3.8점)이 가장 큰 폭으로 높아졌고 사회성(3.8→4점)과 도덕성(3.9→4점)도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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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학생(0.1~0.3점)보다 여학생(0.4~0.5점)이 4개 역량 모두에서 큰 폭으로 향상됐다. 연령별로는 1학년(0.2~0.4점)보다 6학년(0.5~0.7점)이 학습 효과가 컸다. 바둑교육아카데미 강나연(바둑전문 캐스터) 박사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발달하는 고학년 때가 저학년보다 바둑을 통한 교육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도 “바둑은 놀이처럼 즐기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인성의 덕목을 키울 수 있는 유익한 도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바둑과 인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맞닿아 있는 걸까. ‘연결과 끊기’를 주제로 수업을 한 잠현초의 사례는 바둑과 인성이 접목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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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옆에 있는 친구와 손을 잡아 보세요. 서로 손을 연결하니 힘이 느껴지죠?” 학생들은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이 교사를 쳐다봤다. "이번엔 조용히 눈을 감고 앞뒤 친구와 손을 잡아 봐요. 그러면 힘이 더 커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이 교사는 그런 다음 스크린에 큰 바둑판 화면을 띄웠다. “바둑의 시작은 돌과 돌을 연결하는 거예요. 떨어져 있는 돌 사이에 하나를 더 놓으면 세 개가 되죠. 이렇게 네 개, 다섯 개가 되면서 집을 짓는 거예요.” 이 교사는 돌의 연결과 일상생활에서의 협동을 비교했다.

 “물건을 들 때 혼자서는 힘들지만 같이 하면 쉽잖아요. 바둑돌을 연결하는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협동하고 사이 좋게 잘 지내야만 강해지고 행복해지는 거예요.” 이 교사의 이론 설명이 끝나자 20명 남짓한 학생은 짝꿍과 흑백 돌을 나눠 쥐고 대국을 벌였다. 학생의 절반가량이 이번 학기 처음 바둑을 시작했다.

박이든(7)군은 이날 바둑을 배운지 두 번째로 친구와 30분간 접전을 벌였다. 박군은 흑돌을 쥔 채 백돌을 피하며 세를 확장해 나갔다. 박군은 “게임보다 바둑이 훨씬 재밌다”고 말했다. 이 반의 최고수인 강기빈군은 차분하고 집중력 있게 대국을 이끌어갔다. 앞서 알파고에 대한 토론시간에서도 강군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다른 친구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했다.

강군의 아버지 강경덕(43)씨는 “1학년 때만 해도 주의가 산만해 걱정이 컸다. 규칙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하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둑을 배우며 아들이 크게 달라졌다는 게 아버지의 얘기였다. 먼저 인내심과 집중력이 좋아졌다. 강씨는 “참고 기다릴 줄 알면서 교우 관계도 더욱 원만해졌다. 한 수 앞서 생각하는 습관이 들면서 수학적 사고력이나 논리력도 크게 향상됐다”고 말했다. 강군 스스로도 “전엔 한두 번 해보고 포기하는 게 많았는데 지금은 무언가를 배우면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육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처음 바둑을 접하는 경우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강 박사는 “제일 먼저 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졌다고 우울해하지 않고 상대와 소통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걸 알게 해줘야 한다. 반대로 이겼을 때는 상대를 배려해 기쁨을 표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곽민희 흑백바둑원장은 “아무리 연습 바둑이라도 자녀에게 대국 결과를 묻는 것은 금물”이라며 “바둑 예절과 매너 등은 부모들도 함께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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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TV를 통해 알파고 대국을 해설했던 가수 김장훈씨도 “내가 생각하는 바둑의 가장 큰 장점은 패배를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라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인성”이라고 말했다.

글=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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