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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그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보 2016.03.17 00:26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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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디지털제작실장

싸움만큼 재미있는 구경이 없어서 보기는 본다. 공천 싸움 말이다. 주인공까지 매번 바뀌니 박진감은 있다. 김무성, 유승민, 이해찬, 정청래…. 그런데 내 표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번 총선에서 내 기준은 딱 하나다. 우리 동네에는 20년간 방치된 대형 건물이 있다. ‘20년’이란 세월이 말하듯 난제 중의 난제다. 그래서 해결책을 제대로 내놓는 사람을 찍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공천 전쟁만 봐선 그 답을 전혀 모르겠다.

알 듯 모를 듯한 것도 있다. 당의 정체성이다. 선수가 안 정해졌으니 동네 문제 같은 건 얘기 못한다고 이해하려 한다. 그래도 선거 한 달 전이면 정당 대표 공약은 있어야 한다. 정체성이 헛갈리기 때문이다. ‘친노 좌장’ 이해찬 의원을 공천하지 않은 더불어민주당 안에선 김종인 대표를 ‘김할배’로 비꼬며 특정 야권 인사의 낙선을 위해 뛰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헛갈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에게는 정체성을 공약으로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 점에서 14일 나온 더민주의 가계부채 대책은 찬반을 떠나 정체성은 분명했다. 1단계 대책은 소액·장기(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자 114만 명의 부채 면제다. 다만, 이런 공약이 있는지는 작정하고 찾아봐야 한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그러니 알 듯 말 듯 할 수밖에 없다.

감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번에도 공약은 백화점식이 될 게 분명하다. 새누리당의 2014년 지방선거 공약집은 무려 234쪽이었다. 완독한 유권자가 있었을까.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11일 나온 새누리당 노인 공약의 미끼 상품은 노인복지청 신설이다. 그 뒤로는 백화점식 나열이다. 노인복지관 기능 확대, 진료비 부담 완화, 치매 지원 강화…. 모두 다 하겠다는 얘기인데, 뒤집으면 핵심이 뭔지 모른다거나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고백이다.

분명히 아는 것도 있다. 이 문제를 타결해야 할 사람들은 각 당의 정책통들이다. 주로 관계·학계·금융계 출신들이다. 전문가란 얘기다. 이들이 매번 잘못 놓은 수는 더하기다. 정책을 제대로 알리려면 빼기를 잘해야 한다. 다 버리고 핵심만 남겨서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정책 홍보의 첫 단계다. 고충은 안다. 정책이라는 게 미묘해 딱 떨어지게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비책을 찾아야 한다. 적잖은 사람의 만류에도 뜻이 있어 정치판에 뛰어든 것 아닌가. 그런데 영입 때는 전문가로 칭송받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뒷자리에 서 있는 게 정책통들 아닌가. 그렇다면 결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정책통이 정치통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때야 우리도 교과서에나 나오는 ‘정책 선거’라는 걸 해볼 수 있다. 정치인이 된 전문가의 혼신을 다한 한 수가 없으면 정책 선거는 매번 정치 선거에 밀릴 수밖에 없다.

알파고를 이기던 날, 묘수(78수)를 어떻게 뒀느냐는 물음에 이세돌은 이렇게 답했다.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영훈 디지털제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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