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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만에 구한 용서…김주열 시신 운반차 운전기사 묘소에 참배

중앙일보 2016.03.1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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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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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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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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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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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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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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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 시신 유기 당시 차량 운전기사였던 김덕모(77)씨가 1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민주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에 헌화한 뒤 말없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13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국립 3·15 민주묘지. 짙은 황색 코트를 입은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다가와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동안 묘비를 어루만지며 “미안하오. 미안하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묘비의 주인공은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1943~1960) 열사. 묘비 앞에 고개를 숙인 사람은 김 열사의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 버릴 때 차량을 운전한 운전기사 김덕모(76)씨였다. 그는 56년 만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이날 묘소를 찾았다.

김씨는 이날 참배 후 “용서를 빌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생전에 한번은 찾아오고 싶었는데 뒤늦게나마 속죄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했다.

김씨는 3·15의거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운전을 배워 마산의 한 사업가의 지프 운전기사로 일했다. 당시 차량이 흔치 않아 경찰은 이 사업가의 차를 간혹 빌려썼다. 3월 15일에도 김씨는 경찰에 파견돼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차를 탄 사람은 김 열사에게 최루탄을 쏜 마산경찰서 박종표 경비주임(당시 경위)이었다.

이날 김 열사는 박 경위가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시신은 이날 오후 10시쯤 마산 남전(지금의 한전, 현 무릎병원 앞)에서 박 경위가 발견했다.

하루 뒤 김씨는 김 열사를 처음 봤다. 박 경위의 지시로 오전 5시쯤 차를 몰고 마산세무서에 도착했을 때다. 탱자나무로 된 울타리 옆 도랑에 김 열사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가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박 경위 등 경찰 3명과 민간인 1명이 김 열사의 시신을 차로 옮겼다. 원래 김 열사의 시신을 야산에 묻을 계획이었지만 가는 도중에 마산제1부두(현 가고파 국화축제장)앞 바다에 버리기로 계획을 바꿨다.

이들은 부두에 있던 철사를 이용해 김 열사의 시신과 돌을 한데 묶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철사가 느슨하게 묶인 탓인지 김 열사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쪽에서 떠올랐다. 김 열사의 처참한 모습은 사진을 통해 마산뿐 아니라 전세계로 알려졌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씨는 그 뒤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경찰 지시로 단순히 운전만 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그러나 죄책감을 씻을 수는 없었다. 그 죗값을 조금이라도 씻고 싶은 마음에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매일 같이 기도를 했다.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김 열사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9일 우연히 라디오에서 김주열 열사기념사업회(공동대표 김영만)의 행사 소식을 들었고, 사업회를 찾아가 상의한 끝에 이날 공개 사과를 결심했다.

김 씨는 “평생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는데 뒤늦게나마 이렇게 직접 사죄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지금에 와서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겠지만 천당에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창원=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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