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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린 오치균 ‘뉴욕 자화상’

중앙일보 2016.03.14 00:58 종합 2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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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균의 뉴욕 3기 그림 ‘웨스트 브로드웨이’,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사진 금호미술관]

꾸득꾸득 말라붙은 물감 더께가 작은 웅덩이들을 이루고 있다. 캔버스에 다가가면 두터운 물감 회오리뿐이다. 뒤로 천천히 물러나면서 나무가, 건물이, 하늘이 보인다. 오치균(60) 씨의 그림은 양면성이 강하다. 추상과 구상이, 이성과 감성이 등을 맞대고 있다. 붓이나 나이프 대신 손가락을 쓰는 ‘핑거 페인팅’이기 때문일까. 서늘하면서도 뜨겁고, 단정하면서도 혼미하다.

지난 4일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개막한 ‘오치균 , 뉴욕 1987~2016’전은 30년에 걸쳐 그린 한 도시에 대한 화가의 촉각적 회고다. 한 끼 밥을 걱정해야 했던 가난한 유학생으로 미국 뉴욕과 만났던 이방인 화가는 온통 시커먼 화면 속에 짐승처럼 웅크린 자화상을 짓이겼다. 어둑한 단칸방, 검은 회오리의 지하철, 벌거벗은 노숙자가 ‘뉴욕 1기(1987~90)’의 열쇳말이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흔적과 외부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화면 가득 흩뿌려져 있다.

‘뉴욕 2기(1993~95)’는 훨씬 밝은 색감으로 안정된 화면을 보인다. 귀국전이 호평을 받으면서 경제적 안정과 심리적 자신감을 얻은 뒤 다시 찾은 뉴욕이다. 작가는 “공포에서 여유로 마음이 변하면서 잿빛 빌딩보다 파스텔톤 나무가 눈에 들어온 시기”라고 설명했다. 2014년 가을 이후의 그림을 모은 ‘뉴욕 3기’는 알록달록한 센트럴파크 풍광이 처음 등장할 만큼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빛의 향연이다. 한 도시 이야기가 한 인간의 생애를 주마등처럼 비춘다.

화가는 독특하게도 도록 끝에 뇌과학자인 정재승 KAIST 뇌공학과 교수와의 대담을 실었다.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인간이기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작가의 원고청탁을 받아들였다는 정 교수는 이렇게 썼다.
 

그가 손가락으로 짓이긴 물감들 속에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재능과 열등감이 뒤범벅이 된 현실로부터 벗어나, 그가 온전히 몰입하고 숭고한 쾌락을 느끼는 시간들을 정갈하게 축조하려 했던 것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오치균 작가 영혼의 민낯을 보여준다.”


전시는 다음 달 10일까지. 02-720-5114.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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