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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생리대와 젖병이 한국 구원할 것”

중앙일보 2016.03.14 00:20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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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부패한 관료가 매일 한국 우유를 공수(空輸)해 마셨다.” 지난주 중국발 뉴스다. 여기에는 남모를 비밀이 숨어 있다. 한국과 중국 우유는 다르다. 우리가 즐기는 저온살균 우유는 영양소 파괴가 적고 신선하다. 냉장 보관하며 유통기한도 일주일로 짧다. 그리고 비싸다. 반면 땅이 넓은 중국은 멸균 우유를 먹는다. 135도 이상 고온으로 가열해 모든 균을 죽이는데, 상온 보관이며 유통기한도 6개월이 넘는다. 그래서 싸다. 하지만 한번 저온살균 우유에 입맛을 들이면 멸균 우유는 먹기 힘들다.

요즘 수출이 줄었다고 야단이다. 특히 대중 수출 감소가 문제다. 중국은 줄곧 ‘차이나 인사이드(China inside)’가 전략이었다. 중국산 소재·부품 비중을 끊임없이 높여왔다. 중간재 중심인 한국의 대중 수출은 언젠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 밝은 독자라면 위의 기사에서 ‘중국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미 베이징·상하이·톈진 등 중국의 3대 도시는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를 웃돈다. 멸균 우유 대신 저온살균 우유를 즐길 수준이 됐다. 이런 변화는 우리 수출 통계에도 잡힌다. 최근 화장품·유아용품 등 고급 소비재의 대중 수출이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대기업 수출은 11%나 줄었지만 중견기업(매출액 1500억원 이상, 자산 5조원 이하)의 수출이 3.2% 늘어난 점도 눈에 띈다. 고급 소비재 중심의 중견기업 수출이 새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동안 국내 유아용품 업계는 초저출산으로 인해 초상집이었다. 베비라는 도산했고, 아가방은 중국에 팔렸으며, 해피랜드도 복합골절 상태다. 하지만 보령메디앙스의 운명은 정반대다. 유아용 누크 젖꼭지와 젖병, 아토피 제품 등을 만드는 이 업체는 중국 특수에 힘입어 주가가 10배나 폭등했다. 중국의 젊은 엄마들은 2008년 멜라민 파동을 잊지 못한다. 공업용 멜라민 분유로 4명이 숨지고, 영·유아 5만4000여 명의 신장이 망가진 사건이다. 이 트라우마로 중국 분유시장의 70%를 해외 프리미엄 분유들이 차지할 정도다. 보령메디앙스도 현지에서 믿을 만한 유아 명품으로 떠오르며 대박이 났다. 이 회사의 ‘B&B’는 중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유아용 브랜드다.

비슷한 기적이 생리대에도 일어났다. 중국의 생리대시장은 무려 10조원 규모. 특히 대도시의 프리미엄 생리대시장은 글로벌 브랜드인 P&G 등이 장악해 왔다. 하지만 2014년 발암물질인 형광증백제 파동이 터졌고, 지난해엔 방사능 기준치의 35배가 넘는 중국산 생리대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대도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갑자기 한국산 한방 생리대 바람이 불었다. 방사능·형광증백제 오염이 전혀 없고 방취(냄새 억제)도 잘된다는 입소문이 나돈 것이다. 순식간에 생리대·기저귀를 생산하는 모나리자의 주가가 700원에서 4270원으로 뛰었다.

보령메디앙스와 모나리자는 우리 경제의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다. 중국은 수출·투자에서 내수·소비 쪽으로 방향을 틀고, 소비자들의 입맛도 까다로워졌다. 어차피 최상위 명품은 유럽이 독차지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차상위 명품시장은 우리가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물론 리스크는 있다. 중국 토종 업체들이 빠르게 품질과 안전성을 끌어올리고, 그동안 해외 쇼핑을 장려해 온 중국 정부의 외환 정책이 언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 소비자들은 현지의 토양과 공기까지 오염됐다고 불신하는 분위기다. 한국 업체가 현지 생산하는 제품도 못 믿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한글로 된 상표가 붙어야 믿고 구매하겠는가.

산업자원부 이인호 무역투자실장은 “화장품·유아용품·생리대 등이 한국 경제를 구원할 새 먹거리”라고 했다. 고급 소비재는 한류 붐에 민감하고, 중견·중소기업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품들이다. 온라인 해외 직구도 많은 분야다. 그렇다면 국가 차원에서 현지 대도시 주변에 대규모 한국산 공동집배송·반품센터를 세우면 어떨까. 고급 소비재는 물론 신선하고 깨끗한 한국산 농수축산물 수출까지 확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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