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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71> 정약용 남도 유배길 2코스

중앙일보 2016.03.11 00:05 Week& 4면 지면보기
l 동백을 사랑한 다산, 모란을 노래한 영랑의 숨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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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강진 만덕산에 들어앉아 있다. 만덕산은 예부터 차가 많아 다산(茶山) 이라고 불리던 산이다. 길은 다산의 흔적이 어린 초당을 지나 백련사로 이어졌다.


전남 강진은 서쪽으로 해남, 북쪽으로 영암, 동쪽으로 장흥과 맞닿아 있다. 민물(탐진강)과 바닷물(남해)이 뒤섞이는 강진만이 뭍의 중앙을 파고들어 지도에서 강진은 말굽처럼 얇고 긴 모양으로 나타난다. 양쪽으로 길쭉한 강진 땅의 왼쪽을 남에서 북으로 훑는 길이 있다.
남쪽 해남과의 경계(장수마을)에서 시작해 강진을 통과한 뒤 북쪽 영암과의 경계(월출산 천황사)까지 이르는 ‘정약용 남도 유배길’이다.

강진으로 유배 왔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흔적을 되밟는 길로 2011년 완성됐다. 모두 65㎞ 길이, 4개 코스의 유배길에서 2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을 걷고 왔다. 강진군 도암면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해 강진 읍내에 있는 영랑 김윤식(1903∼50) 시인의 생가까지 15㎞ 길이의 길이다.
옛 성현이 걸었던 길에서 이제 막 봄이 내려앉은 강진군을 속속들이 탐했다.
 
3월에는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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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림. 만개한 동백이 바닥에 깔려 붉은 융단을 이루는 장관은 이달 말쯤 볼 수 있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18년 동안 강진에 머물렀다. 해서 강진에는 다산과 관련한 장소가 많다. 다산이 처음 거처로 삼았던 주막집 쪽방 ‘사의재(四宜齋)’, 1805년부터 2년간 머물렀던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 1808년부터 1818년까지 기거했던 ‘다산초당(茶山草堂)’ 등 유배시절 다산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오늘도 강진은 다산의 고장이었다. 강진 읍내의 한 기사식당이 간판에 ‘다산’을 걸고 있었다. 이름하여 ‘다산기사식당’이었다.

2코스 시작점인 다산수련원을 찾아 만덕산(408m)에 들었다. 수련원에서 만난 김영구(57) 강진군 교육홍보팀장이 “2011년부터 공무원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했다. 작년에만 6000명이 넘는 공무원이 연수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다산 사상을 배우고 다산초당·백련사 등 유적지를 찾아가는 1박2일 연수 프로그램은 일반인(20명 이상 단체만 가능)도 참여할 수 있다.

다산수련원 뒤편의 두충나무 산책로가 어여뻤다. 어른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게 길을 내고 양옆으로 두충나무를 빽빽이 심었다.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는 아직 가지가 앙상했다. 하나 나무가 박힌 땅은 달랐다. 땅을 몇 번 디디니 시뻘건 황토가 신발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땅은 벌써 새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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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강진에서 처음 거처로 삼았던 주막 사의재.


다산초당은 그윽했다. 깔끔하게 보존된 산방 곳곳에 다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산은 초당 근처에 동백을 심고 계단식 밭을 일궈 농작물도 길렀다. 특히 동백을 끔찍이 여겼단다. 유배가 풀려 강진을 떠나있을 때도 제자에게 서신을 보내 ‘선춘화(先春花)’의 안부를 물었다. 다산은 동백을 봄에 먼저 피는 꽃이라 하여 선춘화라 불렀다.

초당 왼편에는 학생 기숙사로 사용했던 서암(西庵)이, 오른편에는 다산의 거처였던 동암(東庵)이 위치했다. 다산은 동암에 머물면서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책 600여 권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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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

다산초당부터 백련사까지 약 1㎞ 길이의 산책길은 평범한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걷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산은 강진에 내려온 지 10년 만에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났다.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다. 혜장선사와 다산은 낮이고 밤이고 벗을 만나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 우정을 보러 가는 발걸음을 상상해봤다. 그 길은 늘 따스한 봄이었을 터였다.

백련사에 들기 직전 야생차밭과 울창한 동백숲이 천리 밖에서 온 손님을 먼저 맞이했다. 수령 400년이 넘는 아름드리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모여 있는 백련사 동백림은 숲 자체가 천연기념물이다.

“동백이 만개하는 3월 말부터 백련사는 바빠져요. 음력으로 3월이 지나고부터는 차를 수확해요. 우리 절에서 수확한 차를 다산 선생도 즐겨 마셨다지요.” 백련사 종무소 관계자의 절 자랑이 이어졌다.
동백숲 길 바닥에는 간간이 동백꽃이 뒹굴었다. 아직은 때가 일렀다. 모든 나무가 꽃을 틔운 것은 아니어서 붉은 동백 융단은 볼 수 없었지만 올해 처음으로 마주한 봄꽃에 기분이 들떴다. 보물이라도 찾듯이 땅에 떨어진 꽃송이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고, 언제나 망울을 틔울까 수줍게 입을 벌린 꽃봉오리를 곰곰이 올려다보았다. 남도 끝자락 강진은 진즉에 봄이었다.


4월에는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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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갯벌을 드러낸 강진만.


백련사에서 내려온 길은 신평마을을 지나 강진만 바다를 끼고 이어졌다. 물이 빠지자 강진만에 너른 펄이 펼쳐졌다. 고니·노랑부리저어새 등 아직 떠나지 않은 겨울철새가 펄에 머리를 박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펄은 육중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강진만에서는 예부터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았다. 펄을 뒤져 꼬막·낙지·개불·백합조개 등 갯것을 잡고, 물이 찼을 때는 농어와 장어를 낚아 연명했다. 1930년대 일본이 강진만 일대를 간척하기 이전의 이야기다.

남포마을에 가까워지자 길 주변이 온통 갈대 천지였다. 높이 3m가 훌쩍 넘는 갈대가 봄바람에 휘청거렸다. 남포마을은 예부터 멸치젓갈로 이름난 고장이다. 이곳에서 젓갈을 생산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고 전해진다. 강진의 옛 이름이 탐진이다. 탐라(제주도의 옛 이름)에서 뭍으로 들어오는 나루의 기능을 한다 하여 이름 붙었다. 제주도·추자도 등지에서 잡아온 멸치가 남포마을에서 삭혀져 내륙으로 옮겨졌다.

남포마을 옆의 목리마을은 장어로 유명한 고장이다. 옛날에는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는 강진만에서 장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목리마을에 장어 통조림 공장을 지었을 정도였다. 구수한 장어 굽는 냄새를 기대하면서 마을에 들었지만, 마을에 장어 식당은 두 곳뿐이었다. 57년 문을 연 전설의 장어 집 ‘목리장어센터’에 들어갔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장어가 많이 잡혔어요. 6월 말 첫 장마가 왔을 때 다리 위에서 보면 장어가 우글우글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요. 사나흘 꼬박 작업을 해도 20㎏도 못 잡아요.”

이창현(57) 목리장어센터 사장의 넋두리가 아팠다. 목리마을에는 너른 밭이 펼쳐졌다. 밭은 두 가지 색으로 나뉘었다. 황토의 붉은색과 보리밭의 초록색이었다. 자연이 빚어낸 두 원색이 확연하게 대비를 이뤘다.

“해남이 황토고구마, 황토배추 등 황토로 유명하잖아요. 강진도 황토가 많아요. 해남 땅이나 강진 땅이나 똑같지.”

윤동옥(59) 문화해설사가 말했다. 강진은 해남과 위도가 똑같다. 강진은 해남과 더불어 뭍에서 가장 봄이 이른 지역이다. 강진에서 봄을 알리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산에서는 동백, 밭에서는 보리, 바다에서는 개불이다. 개불은 강진만 펄에서 난다. 강진만 개불은 색이 꺼무튀튀하고 크다. 쫄깃쫄깃하고 단맛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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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식당의 회춘탕.

강진 읍내에 들어섰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강진도 시장 골목이 제일 북적거렸다. 강진전통시장은 지난해 상점과 식당 구역을 분리했다. 식당동에는 한정식·낙지요리·회춘탕 등 강진 대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 9곳이 있었다. 가시오가피·칡 등 약초 12가지로 국물을 내고 문어·전복·오리를 넣고 2시간 가까인 곤 회춘탕은 최근 강진군이 내세우는 대표 먹거리다. 푹 끓인 오리와 문어가 부드럽게 씹혔다.

2코스는 사의재를 지나 시인 김윤식 생가에서 끝났다. 김윤식은 다산과 더불어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영랑으로 더 익숙한데, 영랑이 아호(雅號)고, 윤식이 본명이다. 영랑 생가에는 모란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모란꽃은 4월이 돼야 만개한다고 했다. 돌담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만개한 모란꽃을 떠올렸다. 봄이 한창 무르익을 4월에 다시 이길을 걸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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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정보=강진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약 5시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서천공주고속도로∼서해안고속도로를 차례로 달려야 강진 읍내에 닿는다. 정약용 남도유배길 2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은 15㎞ 길이로 넉넉잡아 5시간이면 걸어볼 수 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오솔길을 제외하고는 평지여서 걷기에 쉽다. 강진군 문화관광과 061-430-3316. 숙박은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 한옥체험관(sauijaehanok.com)을 추천한다. 강진군이 운영하는 곳으로, 지난해 문을 열어 시설이 깔끔하다. 1박 4만원부터. 강진전통시장에 있는 ‘으뜸식당(061-432-2011)’이 회춘탕 전문 식당이다. 회춘탕 4인 기준 10만원. 전통의 장어구이 집 ‘목리장어센터(061-432-9292)’는 지금도 자연산 장어를 고집한다. 장어 구이(250g) 2만원.


글=홍지연 기자 jhong@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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