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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윤상현 음모론’에서 봐야 할 것

중앙일보 2016.03.11 00:35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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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음모(陰謀)는 두 명 이상이 몰래 일을 꾸미는 것이다. 폭력이나 부도덕하거나 비합법적인 수단이 동원된다. 앞에서 웃으면서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음모는 드러나도 진상을 알기 어렵다. 공개되는 즉시 꼬리를 자르고 증발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없는 음모를 조작해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역음모도 발생한다. 새누리당은 요새 음모로 날이 새고 음모로 날이 진다. 친박과 비박이라는 패거리로 갈려 서로 상대방을 음모 집단이라고 삿대질한다. 마치 총선이 여야가 아니라 여여끼리 싸우는 것 같다.

열흘 남짓에 대형 음모 사건이 벌써 세 개 터졌다. 김무성의 살생부설, 여론조사 유출 사건에 이어 윤상현 녹취록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살생부 논란으로 비박의 김무성 대표가 일격을 맞았다면 여론조사 유출 사건은 유불리가 가려지지 않았다. 최근의 녹취록 폭로는 친박 윤상현 의원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양 진영이 겪은 아픔의 전적은 1승1무1패인 셈인데 내상의 정도로 보면 친박이 더 넓고 깊게 멍들었다. 음모론이 거듭될수록 친박 진영이 노렸던 이른바 ‘물갈이 공천’의 정당성은 무너지고 있다. ‘물갈이, 어두운 곳에서 그들끼리 결정해 버린다’는 감정이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한구 위원장의 공천관리위다. 이한구의 결정이 승복의 힘을 잃게 되면서 물갈이 공천은 무의미한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녹취록 사건이 터지자마자 현역 1호로 불명예 탈락한 김태환(구미을)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불길한 전조(前兆)다. 그동안 만화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치부됐던 일이 생길 수 있다. 김무성이 명분이 축적됐다고 보고 당 공천장에 대표 직인을 찍지 않는 사태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도 김무성의 비박 세력 혹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현역 의원들이 좋아진다고 볼 수도 없다. 친박과 비박의 막장 대결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자멸로 이어진다. 어부지리(漁夫之利)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 세력의 몫이다. 음모론 정치에 계몽적 효과는 있다. 사람들이 친박과 비박이 ‘적대적 공존’이 아니라 ‘적대적 공멸 관계’라는 점을 보게 됐다.

그동안 한국의 정치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의 성장이 아니라 상대방을 소멸하는 데 두는 적대적 양당 체제였다. 상대방을 적대시해야 내가 사는 삶의 양식이다. 분노와 증오, 죽임의 정치문화는 그 토양에서 자라났다. 나의 손해가 상대방의 이익이 되고, 그쪽이 죽어야 이쪽이 산다는 공격적·파괴적 심리는 유권자가 양대 정당 외 다른 선택이 불가능할 때 형성된다. 친박과 비박의 지지자들은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친박이나 비박 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김종인의 더민주가 친노패권·운동권 세력을 솎아내고 ‘핵무기 가진 김정은’을 상대로 안보정책을 현실적으로 수정하면서 그쪽 공간이 열렸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는 ‘적대적 공존’이라기보다 ‘경쟁적 공존’으로 전환기를 맞이했다. 아예 3당 구조, 3당 문화로 한국의 정치교체를 추구하는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새누리 유권자에게 좀 더 다양한 입맛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20대 총선 무대에서 벌어지는 야권의 창조적 분열과 기이한 김종인의 등장은 새누리당의 낡은 정치문화, 음모적 권력투쟁을 한껏 밝게 비춰주고 있다. 새누리당 계파 보스들은 난쟁이처럼 작아지고 초라해졌다. 안보·경제의 국가 비상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당 내 공멸적 계파싸움의 한쪽 편을 들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안타깝다. 선거 전략이라곤 그저 박 대통령의 의중과 동선(動線)밖에 없는 친박들이 자기 정치 욕심에 대통령을 함부로 팔고 다녀서 생긴 일이다. 박 대통령은 음으로 친박 내 적대적 공존파들을 정리하고, 양으로 정파·정당의 승부를 초월한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새누리당 집안 사람들은 친박과 비박이 적대적 공존이 아니라 적대적 공멸 관계로 바뀌었음을 알아채야 한다. 유권자는 이미 다 안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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