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수대] 자카르타 평양랭면집의 참이슬

중앙일보 2016.03.11 00:30 종합 31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한국인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니까요.”

4년 전 이맘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출장을 갔다가 현지인에게 식당 추천을 받으며 들은 말이다. 어딘지는 비밀이라며 그가 안내한 곳엔 대형 간판에 한글로 ‘평양랭면’ 네 글자가 선명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새빨간 궁서체. 맞다. 북한 식당이었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원은 젊고 아리따운 여성 일색이다. 그들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어서오시라요”고 건네는 인사를 들으며 테이블에 앉으니 눈에 익은 참이슬 로고가 박힌 소주잔이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공연에 돌입한 그들은 한국 가요와 ‘마이 웨이’ 같은 미제(美帝) 팝송도 불렀다. 한국 노래를 불러도 되느냐고 물으니 뭘 그리 순진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A접대원 동무. “(손님들이) 좋아들 하시지 않습네까”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1달러라도 더 벌기 위해선 별일 아니라는 듯했다. 그런 그가 입고 있는 레이스 한복에 달려 있는 북한 배지는 미묘한 이물감을 자아냈다.

이제 이곳은 ‘한국인이라면 가지 않는 게 좋을 곳’이 됐다. 정부가 지난 8일 독자 대북제재를 발표하면서 해외 북한 식당 출입 자제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밥값으로 얼마나 번다고 핵·미사일 개발 비용을 대겠냐는 불만도 나온다. 하지만 북한이 해외 식당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연 수익이 1000만 달러(약 120억원)라는 추정치에 근거가 없어 보이진 않는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기 전엔 100개 남짓했지만 지금은 13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들의 성업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톡톡히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호기심 때문이라지만 그 호기심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는 종류의 것은 아닌 듯하다.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 벌이는 신비 마케팅과 미녀 마케팅에 우리가 넘어간 셈이니 말이다. 기자부터도 그랬다.

인권 문제도 있다. A 같은 접대원들은 성희롱에도 쉽게 노출되는데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다고 한다. 손님을 끌기 위해 비위를 맞추다 보면 자존심은 버려야 할 때가 많을 터다.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 가혹하지 않은가. 김정은의 핵 개발 야욕을 막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넓게 보면 A 같은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호기심은 꾹 누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야 자카르타의 평양랭면집이나 프놈펜의 평양아리랑관이 아닌 평양의 진짜 옥류관에서 냉면 한 그릇 맛있게 비울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