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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축구팬은 왜 매일 우유를 마실까

중앙일보 2016.03.10 00:30 종합 2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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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제수매’ 캠페인을 제안한 수원 삼성 팬 김진영(오른쪽)씨. 이 캠페인에는 팬과 선수단 등 수백명이 참여했다. [사진 김경빈 기자], [사진 수원 삼성 SNS]


홍대 인디밴드 ‘세라 밴드’의 리더 김진영(36) 씨는 요즘 매일 우유를 마신다. 밴드 멤버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틈 날 때마다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권한다. 학창 시절 급식 이후로 흰우유를 쳐다본 적도 없던 그가 ‘우유 홍보대사’로 거듭난 건 축구 때문이다.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열혈팬인 김 씨는 새 시즌 개막(12일)을 앞둔 K리그 클래식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제수매 캠페인’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다.

구단들 경제 불황에 운영비 줄어
국내 스타 잇달아 중국으로 이적


‘제수매’는 ‘제발 수원 팬이라면 매일우유를 마시자’의 약어다. 캠페인 방법은 지난해 루게릭병 환우를 돕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유행했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ice bucket challenge)’와 닮았다. 해당 회사의 우유를 마시거나 들고 있는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SNS)에 올리고, 다음 참여자 세 명을 지목해 확산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16일 시작한 이 캠페인의 참가자는 채 한 달도 되기전에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수원 팬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제품 구매 운동을 벌이는 이유는 이 회사가 올 시즌부터 3년간 수원의 유니폼 스폰서십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9일 서울 양평동 연습실에서 만난 김 씨는 “수원이 최근 살림살이를 줄여가면서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떠났다. 모처럼 나타난 큼직한 후원사를 지원해 수원이 좋은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의도” 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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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미드필더 권창훈

K리그 클럽들은 최근 ‘군살 빼기’를 하고 있다. 장기적인 경제 불황으로 기업형 구단들의 자금줄이 마르면서 이적료·연봉 등 선수 인건비부터 줄였다. 세계축구계의 ‘큰 손’으로 떠오른 중국 수퍼리그가 국가대표급 K리거를 줄줄이 데려가 스타를 앞세운 마케팅도 예전 같지 않다. 팬들이 “고사 위기에 빠진 우리 팀과 K리그를 살리자”며 직접 행동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제수매’처럼 팬들이 모금이나 집단 구매 행위를 통해 응원하는 팀을 조직적으로 돕는 ‘소셜 펀드레이징(social fundraising)’의 성공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나폴리 팬들은 지난 1984년 FC 바르셀로나(스페인) 소속 공격수 디에고 마라도나(56)를 데려오려는 구단의 노력에 모금 운동으로 힘을 실어줬다. 나폴리가 당시 최고액인 960만달러(72억원)의 이적료를 마련하지 못해 애를 겪자 팬들이 돈을 모아 부족한 액수를 충당했고,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마라도나를 데려오기 위해 전세기도 띄웠다. 이전까지 강등권을 전전하던 나폴리는 마라도나를 앞세워 1987년 정규리그 첫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FA컵) 우승을 함께 이루며 2관왕에 올랐다. 1989년에는 유러피언컵(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정상에 올랐다.

쾰른(독일) 팬들은 ‘맥주 캠페인’으로 간판 골잡이를 되찾았다. 쾰른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다 리그 최강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루카스 포돌스키(31)가 벤치 멤버로 전락하자 지난 2009년 자발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임대 형식으로 다시 데려왔다. 당시 쾰른 팬들은 맥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각자 원하는 만큼의 기부금을 내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 카이저슬라우테른은 1996년 독일 2부리그로 강등된 직후 홈 팬들이 모금해 만든 돈으로 명장 오토 레하겔(78·그리스) 감독을 영입했다. 레하겔 감독의 리더십을 앞세운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이듬해 2부리그에서 우승하면서 1부리그로 복귀했고, 1998년에는 곧장 1부리그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서포터스가 아예 구단을 인수한 경우도 있다. 잉글랜드 포츠머스 팬들은 2000년대 들어 구단주가 줄줄이 바뀌는 과정에서 팀이 빚더미에 오르고 4부리그까지 추락하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열혈팬들을 중심으로 PST(pompey supporters trust·폼페이 서포터스 트러스트)라는 회사를 만들어 지난 2013년 4월 구단 지분 100%를 매입했다.

서정원(46) 수원 감독은 “유럽에서나 보던 소셜 펀드레이징을 K리그에서도 볼 수 있어 놀랍고, 감사하다”면서 “이 캠페인이 구단과 팬이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성공사례로 자리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화성=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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