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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중앙일보 2016.03.10 00:20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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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크리스토프
NYT 칼럼니스트

미국 역사상 가장 놀라운 대선전이 펼쳐지고 있다. 한물간 정치인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반(反)베트남 전쟁 바람을 타고 대권을 잡은 1968년 이후 가장 충격적이다.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원들조차 자당 경선 1위를 달리는 후보에게 질겁하고 있다. 이 후보는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다.

미 대통령 가운데 선거로 뽑히는 공직은커녕 군대조차 근무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허버트 후버, 두 명뿐이다. 그러나 이들도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내각에서 국정 경험을 쌓았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경험조차 없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여성과 소수인종을 모욕하고 온갖 기괴한 정책을 밀어붙여 유례없는 기록을 세울 것이다.

트럼프는 언론을 교활하게 조종하며 유권자의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만큼 지식이 없고 허풍을 떨며 수준이 낮은 정치인은 본 적이 없다. 이번 대선 경선에 나선 후보들은 대부분 중고생 수준으로 말했지만 트럼프는 초등학교 3~4년생 수준으로 얘기했다. 네바다 경선에서 테드 크루즈는 중2, 힐러리 클린턴은 중1 수준으로 연설했다. 반면 트럼프의 발언은 초등 2년생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열광하는 미국인은 많다. 필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가상의 유권자와 대화를 나눠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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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보다 경험이 없는 선동가를 왜 지지하나?

유권자 : 당신네 언론인들은 잘난 척만 할 뿐 사람을 몰라본다. 트럼프는 성공한 사업가다. 국정에 필요한 경험은 다 갖고 있다. 경험 많다는 정치인들이 그동안 국민에게 해준 게 뭐냐? 부패하고 망가진 정치 외에 무엇이 있나? 이젠 새 인물을 밀어줄 때다. 최소한 트럼프는 국민에 솔직하다.

필자 : 트럼프가 돌직구를 던지긴 하지만 진심 어린 얘기는 아니지 않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그를 이길 후보는 없다. 트럼프의 경쟁자는 트럼프 자신뿐이다. 트럼프가 유세 도중 했던 수많은 거짓말을 묶어 ‘올해의 거짓말’ 상을 준 단체도 있다. 공화당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면 클린턴에게 대통령 자리를 갖다 바치는 거나 다름없다. 도박 전문가들은 공화당은 트럼프 때문에 백악관은 물론 상원까지 민주당에 뺏길 것으로 보고 있다.

유권자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트럼프는 바로 그런 전문가들이 늘 잘못된 예측을 내놓는 걸 입증해온 사람이다. 앞으로도 트럼프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틀렸음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인용하는 도박 전문가들은 뭐라고 주장했나?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을 25%나 제시했다. 다른 공화당 후보들이 트럼프를 경선에서 끌어내리려 난리 치는 와중에도 그렇게 높은 확률을 준 것이다. 이제 경선이 끝나고 공화당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뭉치면 당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거다.

필자 : 이렇게 증오심 가득한 사람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백인 우월주의 단체 ‘큐 클럭스 클랜(KKK)’에 침묵하면서 멕시코 이민자에겐 ‘강간범’이라고 욕하며 거품을 문다. 무슬림은 몽땅 요주의 인물로 등록시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인종주의자가 백악관에 입성해도 괜찮은가.

유권자 : 진정하라. 당신들 언론은 트럼프에게 툭하면 인종 카드를 꺼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정치인들에게 질렸다. 트럼프의 발언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우유부단하지는 않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도를 넘는 발언들은 유세용일 뿐이다.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경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술인 것이다. 그의 이력을 보라. 이념주의 정치인이 아니라 협상가·해결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필자 : 트럼프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권위에 먹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편들고, 중국의 천안문 광장 학살에도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영국에선 ‘트럼프 입국 금지’ 청원서에 58만 명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는 “트럼프 같은 보호주의 선동가가 미국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는 예측만으로도 전 세계에 금융위기가 터질 수 있다”고 했다.

유권자 : 다시 한번 진정하라. 외국인들이 우리를 좋아할지 말지는 관심 없다. 외국인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기만 하면 된다.

필자 : 트럼프는 여성을 가슴 크기로 평가한다. “여성의 가슴이 절벽이면 10점을 주기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여성을 모욕하고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자는 건가?

유권자 : 트럼프는 TV 예능프로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극적인 말을 쏟아낸다. 앞으론 대통령 후보의 지위에 걸맞게 발언 수위를 조절할 것이다. 그 측면에서는 그가 크루즈나 루비오보다 선수다. 당신은 자꾸 트럼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결국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모든 걱정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니까 ‘트럼프 대통령’이란 말에 익숙해질 준비나 해두라.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NYT 칼럼니스트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2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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