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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⑥ 더블린에 비가 내리면

중앙일보 2016.03.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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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의 명소, 템플 바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펍 ‘템플 바’.


때로, 비는 여행자에게 치명적이다. 부푼 마음으로 떠난 낯선 도시에 비가 쏟아진다면 더욱 그렇다.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기네스 맥주의 본고장, 더블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블린 사람들 말처럼 적어도 펍(Pub)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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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펍, 브레이즌 헤드.


지난 2월, 더블린에 도착한 날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것도 재난 영화. 버스에서 내려서기가 무섭게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어렵사리 찾아간 숙소는 싸늘했다. 창밖은 잿빛이요, 창을 열면 하프 현 쥐어뜯는 바람 소리가 났다. 휴, 한숨을 쉬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코러스를 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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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 강 위에 커다란 반지를 걸어놓은 듯 반짝이는 하페니 다리.


점심을 해결하고 비도 피할 겸 브레이즌 헤드(The Brazen Head)를 찾았다. ‘황동 머리’란 뜻의 브레이즌 헤드는 1198년 문을 연 아일랜드 최고령 펍이다. 요새를 닮은 외관에서부터 800년을 훌쩍 넘긴 연륜이 느껴졌다. 자갈이 깔린 마당을 지나, 어둑한 실내로 들어서자 온기가 감돌았다. 바의 중간쯤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청년과 기네스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노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는 고민할 것도 없이 기네스, 식사는 고심 끝에 양고기 스튜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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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즌 헤드에서 우연히 만난 비니는 기네스 애호가다.

바텐더가 건네준 검은 기네스엔 눈처럼 흰 거품이 약 2㎝ 두께로 소복이 덮여 있었다. 어라, 내가 알던 기네스 맞아? 입술에 닿는 보드라운 거품에 한 번, 가볍게 넘어가는 목 넘김에 한 번 더 놀랐다. 혼자서 무언의 감탄을 하며 꿀꺽 마셨다. 그때 옆자리 할아버지가 기네스를 한잔 더 주문했다. 바텐더의 이름을 부르는 모양새가 단골 같았다.
“여기 자주 오세요?”
“자주 오느냐고? 매일 오지.” 
“올 때마다 기네스를 마시나요?”
“물론이지. 나쁜 날씨엔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는 게 최고야. 하지만, 내겐 규칙이 있어. 더블린을 떠나면 기네스를 마시지 않아. 스페인에 가면 레드 와인을 마셔. 레드 와인 좋아하나?”
“그럼요, 레드 와인도 기네스만큼 좋아해요.”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난 비니(Vinny)라고 해.”

우리는 기네스로 동맹을 맺은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다. 비니 할아버지는 내게 아일랜드어로 건배를, 나는 한국어로 건배를 알려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알고 보니 그는 브레이즌 헤드에서 아일랜드 민요를 공연하는 연주자였다. 그날은 일이 없었지만 점심을 먹으러 왔다고 했다. 그는 마치 펍을 자기 집 거실로 여기는 듯했다. 

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굵은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스포트라이트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런데도 문 밖으로 나설 용기가 솟았다. 기네스와 따끈한 양고기 스튜로 속을 채운 덕인지, 푸근한 비니와 나눈 수다 덕인지 헷갈렸다. 문득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을 배경으로 쓴 소설 『율리시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전 몇 푼이면 브레이즌 헤드에서 꽤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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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넬 거리에 가면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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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넬 거리에 가면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꽤 괜찮은 경험을 뒤로하고 찾아간 오코넬 거리, 제임스 조이스 동상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비바람을 헤치며 동상 근처 ‘제임스 조이스 센터’로 발길을 재촉했다.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스』,『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 숱한 명작을 남긴 조이스는 늘 더블린에 관해 썼다. 제임스 조이스 센터에서 그의 친필 원고와 편지, 사진, 초판본 등을 둘러보니, 더블린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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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비 내리는 밤, 템플 바의 연인들.


‘펍을 스치지 않고 더블린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블린을 잘 묘사한『율리시스』의 대표적인 문장이다. 실제로 더블린에는 1000개가 넘는 펍이 있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템플 바(Temple bar)다.

템플 바는 유명한 술집 이름이지만 서울의 종로 같은 지명이다.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리피 강 남쪽, 웨스트모얼랜드 거리부터 피쉬앰블 거리를 지칭한다. 그 거리엔 20여 개의 펍이 있고, 극장·갤러리도 즐비하다. 80년대에 버스 터미널을 조성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후 음악가, 연극배우, 화가들이 모여들며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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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


소설 『율리시스』의 주인공, 블룸이 된 기분으로 리피 강을 따라 걸었다. 하페니 다리를 건너, 상인의 아치를 지나자 템플 바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비에 젖은 자갈길 위로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펍에선가 아일랜드 민요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밴드의 흥겨운 공연을 관람하며 기네스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음악이 흐르는 더블린의 밤, 비가 와도 즐거웠다. 적어도 펍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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