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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건물로 채워진 서울·홍콩·싱가포르, 또 다른 진화 필요”

중앙일보 2016.03.09 01:10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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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렘 쿨하스의 싱크탱크 AMO 대표 레이니어 드 그라프.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3일 오후 7시, 퇴근 시간임에도 서울 중구 서울시청사의 한 회의실에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서울시 공공 건축가,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 등 서울의 공공건축을 매만지는 이들이었다. 모인 목적은 ‘아시아의 세기(The Asian Century)’를 주제로 열린 특강을 듣기 위해서다.

네덜란드 ‘AMO’ 대표 드 그라프
“노출 콘크리트, 유리가 전부 아냐
현대화 고정관념 재정의해야"


초청 강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AMO(Architecture for Metropolitan Office)의 대표 레이니어 드 그라프(52). AMO는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운영하고 있는 싱크탱크 연구소다. 1990년대 후반에 설립된 AMO는 저널리스트·역사학자들이 건축가와 함께 건축과 건축을 넘어선 사회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메가시티, 재생 에너지, 첨단 테크놀로지 등이 단골 이슈다.

“1950년만 해도 인구 800만 명 이상의 ‘메가 시티(Mega City)’는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총 28개로 늘어났어요. 대다수가 아시아의 도시입니다.”

아시아의 메가 시티는 비슷비슷한 고층 건물로 채워져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 서울의 모습을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왜 이런 유사점을 갖게 된 걸까. 드 그라프는 이를 ‘멈춰선 현대화(modernization)’로 봤다.

“현대화를 노출 콘크리트, 강화 유리 등의 재료로 완성한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더이상 연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점점 커지는 아시아의 ‘메가 시티’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화는 진행되고 있는 인간 진화의 과정입니다. 이를 관찰하고 이론화해서 건축에 적용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별도의 싱크탱크를 두고 있는 건축사무소는 드물다. 드 그라프는 “AMO는 모든 고정관념을 재정의(Redefinition)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건물을 지을 때 그 의미와 역할을 넓고 깊게 분석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그는 “리서치 결과, 건물을 짓지 않는 게 낫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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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 벨기에 브뤼셀의 광장에 들어선 ‘EU 서커스 텐트’의 모습. [사진 AMO]


실제로 2001년 유럽연합(EU)이 벨기에 브뤼셀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를 기념해 상징적인 건물을 짓겠다고 렘 쿨하스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AMO는 EU의 수도 선정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만큼 물리적인 건물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건물 대신 유럽의 역사를 전시할 수 있는 임시 텐트를 제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커스 텐트’는 수년간 벨기에·오스트리아·독일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유럽의 역사를 되새기게 했다.

AMO가 2010년 진행한 유럽기후변화재단(ECF)의 프로젝트는 이 싱크탱크의 융복합적인 연구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준다. EU 국가들이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의 80%를 감축할 수 있는 방법으로, AMO는 ‘에네로파(Eneropa)’를 제안했다. 영국의 바람, 스페인의 태양 등 EU의 각 나라가 갖고 있는 재생 에너지를 연결해 하나의 전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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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문을 연 프라다의 복합예술공간. 술 공장을 개조했다. [사진 AMO]


렘 쿨하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미국 시애틀 도서관(2004년)도 AMO의 ‘재정의’를 거쳐 설계했다. 드 그라프는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사람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아 ‘책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도서관의 기능을 재정의했다. 책을 쌓아두는 단순한 창고에서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교류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돼야 한다고 봤다. 최근 교보문고가 서울 광화문점을 리모델링하면서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대폭 늘린 것과 맥락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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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 사람들이 모이는 정보 교류의 공간으로 도서관의 기능을 재정의한 미국 시애틀 도서관. [사진 AMO]


AMO의 오랜 단골은 미우치아 프라다다. 지난해 프라다 예술재단이 이탈리아 밀라노 남부에 만든 복합예술공간 ‘행거비코카(HangarBicocca)’를 지었다. 옛 술 공장의 정취를 고스란히 살려 만든 이곳도 AMO가 공간 활용 아이디어를 내 완성했다. 현대 미술관이 없는 밀라노에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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