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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언론의 귀차니즘

중앙일보 2016.03.09 00:35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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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관람 후기엔 이런 유가 적지 않았다. “한국의 기레기들이 꼭 봐야 한다.” 속으론 피식 웃었다. ‘양놈이라고 뭐 다르겠어? 그래 봤자 지들도 기자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영화 ‘스포트라이트’, 딱히 특별하진 않았다. ‘저건 우리도 하는데…’ 하는 모습이 여럿이었다. 전화기 붙잡고 공무원 채근하는 것도, 무작정 기다려(전문용어로는 ‘뻗치기’) 한마디 들으려 하는 것도, 행여 타 신문에 먼저 날까 봐 “젠장!”하며 휴대전화를 던지는 것도 우리랑 흡사했다. 팀장 역의 마이클 키턴이 씹어 삼킬 듯한 표정으로 “두 개의 기삿거리가 있어요. 하나는 타락한 성직자, 다른 하나는 아동 학대를 은폐한 변호사죠”라고 으름장을 놓을 땐 ‘역시 취재 막힐 땐 협박이 최고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한국과 뭐가 다르다는 거지. 우리도 저들만큼 발품 팔고, 피해자 케이스 모으고, 자료 꼼꼼히 비교한단 말이다. 투박한 기자 역의 마크 루팔로가 문서를 빼내며 “피해자 어머니 편지예요. 이제 확실해요”라고 들뜬 목소리로 보고할 땐 내가 마치 한 건 올린 양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어느새 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팀장이 이 말을 뱉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직 아니야. 더 파헤쳐. 한 명이 아닌 체계라고!”

가끔씩 바깥 친구를 만나면 은근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기사 못 나갈 때 종종 있지, 데스크가 빼든가.” 내가 갸우뚱하며 “아니, 별로 없는데. 데스크가 쪼긴 해도 빼진 않아”라고 하면 “에이, 우리끼리 왜 그래”라며 안 믿는 눈치였다. 내가 둔해서일까, 민감한 기사를 쓰지 않아서일까. 기자 한 지 얼추 20년이 됐지만 외압 때문에 기사가 못 나간 경우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언론의 위기라고 하는 걸까.

어뷰징, 연성주의, 편향성 등을 이유로 한국 언론의 위기를 논하지만 어쩌면 진짜 원인은 딴 데 있을지 모른다. 그건 밖이 아닌 안이다. 바로 취재 덜 하기다. 보도자료를 긁어다 올리는 일부 인터넷 매체만이 아니다. 이른바 정론지라 할지라도 취재원의 말을 그대로 옮기기 바쁘다. 누군가 비리를 폭로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의 주장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는 의혹·논란으로 제목을 단다. 전형적인 한건주의요, 폭로주의다. 그래 놓곤 “언론이 특정인의 편을 들어선 안 된다”며 마치 공정한 척, 객관성이란 허울 뒤에 숨는다. 그게 더 캐는 게 귀찮아서, 그래 봤자 피곤하니깐, 자칫 소송이라도 걸리면 욕만 바가지로 먹을 테니 짐짓 외면한다는 걸 언론은 암묵적으로 안다. 이런 실정인데 영화가 “아직 부족해, 개인이 아닌 구조야”라고 하니 제대로 한 방 맞은 듯했다.

스포트라이트 같은 탐사취재팀이 없어 사회의 공기(公器) 역할을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심층 뉴스가 약해진 미디어의 위상을 높여줄 만능 해결사도 아니다. 자신이 쓴 기사를 계속 책임지고 있는가. 정작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이거였다.

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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