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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더는 논개를 욕 보이지 말라

중앙일보 2016.03.09 00:35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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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논개의 순국이 알려진 것은 진주성 백성들의 집념 덕이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함락된 후 진주목의 관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 등 생애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마저도 공식기록은 아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몽인이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모아 만든 문집 『어우야담』에 실린 내용이다. 논개 사후 30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논개에 대한 국가 포상이 처음 건의된 건 사후 130년쯤 지난 경종 1년이었다. 진주성민들이 한 세기가 넘도록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논개를 포상해 달라고 끈질기게 청한 게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진주성 전투는 관군·민간인·의병이 합세해 왜병에 저항한, 임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이때 우국충정으로 장렬하게 죽은 사람은 논개 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진주성민들은 논개를 각별히 애도했다. 그가 완전히 짓밟힌 죽음의 땅, 그 절망적인 순간에 진주성민들에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저항할 힘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 용기와 희망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나 논개는 집권층에선 무시당했다. 전란이 끝나고 정부가 전쟁 당시 귀감이 된 충신·효자·열녀 등의 이야기를 기록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선 논개 이야기가 빠졌다. 기생을 상찬할 수 없다는 사대부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논개는 원래 관기가 아니라 진주성에서 의병을 이끌다 자결한 최경회의 후처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엔 그저 기생이었다. 외간남자를 끌어안고 죽은 여성이 여염집 아낙일 리 없다는 속 좁은 유교권 집권층의 아집으로 그의 생애를 더 살펴볼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400여 년이 흘렀다. 한데 논개에 대한 집권층의 대접은 나아진 게 없다. 요즘 정치권에선 논개를 ‘너 죽고 나 죽자’의 아이콘으로 남용한다. 새누리당의 이른바 ‘논개 작전’. 여기에서 논개는 ‘버리는 패’ ‘희생양’과 동의어다. 공천에서 비박계 현역 의원을 떨어뜨리기 위해 친박계 중진을 먼저 제거해 명분을 쌓는다는 작전이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의원들을 일러 1차 논개, 2차 논개라 한다. 이들이 최후에 끌어안고 떨어져야 하는 ‘적장’은 대통령이 배신의 아이콘으로 찍은 유승민 의원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한데 유승민을 떨어뜨리는 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인가. 지난 공천심사 때 가장 허탈했던 장면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유승민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의 진의를 다그쳤다는 대목이었다. 경제학자 이한구가 정말 요즘 같은 저성장의 경제 상황에 증세 없이 복지가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말인가. 전공 분야인 경제학적 판단력도 희미한 경제학자가 적장으로 지목하는 사람이 진정 적장이 맞는가. 여러 의문이 들었다.

정치권의 논개 남용 사례는 이번만이 아니다. 1997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논개 전략도 어이없었던 사례로 기억된다. 당시 신한국당은 야당 대선주자였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기업에서 받은 600억원을 관리했다며, 그에게 돈을 줬다는 10개 기업 명단을 폭로했다. 국가부도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두 달 전이었다. 이미 경제는 파탄지경이었고, 기업들이 마구 부도가 나던 시절이었다. 이 폭로에 국가경제와 기업은 더욱 냉각됐다. 역시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한국당 측은 이를 ‘감히 나를 죽여 적을 죽이는 논개 전략’이라고 피력했지만 그들이 죽인 것은 국가경제였다.

논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목숨을 바쳐 조국을 침범한 적장을 죽이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킨 사람이다. 그런 그를 과거 집권층은 편견에 사로잡혀 푸대접했고, 현 집권 정당는 같은 당 안에서 죽고 죽이는 자기파괴적 정치싸움에 끌어들여 욕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런 꼴을 계속 봐야 하나. 논개의 명예를 위해 또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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