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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⑧ 예수, “천국은 네 안에 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⑧ 예수, “천국은 네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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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의 공기는 평안하다. 언덕 아래 갈릴리 호수가 보이고, 주위에는 꽃과 나무가 가득하다.


팔복교회의 뜰은 파랬다.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야자수를 비롯한 키 큰 나무들도 곳곳에 서 있었다. 한낮의 볕은 따가웠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순례객들이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무릎에는 성서가 펼쳐져 있었다. 하나 같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산상수훈’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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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한낮 햇볕은 따갑다. 순례객들은 나무 그늘을 찾았다. 거기에 앉아 저마다 묵상을 했다.


저 푸른 풀밭 어디쯤에서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복음 5장7절)

언뜻 보면 당연한 말이다. 자세히 보면 애매해진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자비를 입게 되는 걸까? 그 사이에 연결 고리가 없다. 좋은 일을 하니까 하늘에서도 상을 주는 거겠지. 대충 그렇게 얼버무릴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의 행복론’에는 정확한 이치가 녹아 있다. 그 이치를 풀 때 ‘행복의 비밀’도 풀린다.

어찌 보면 예수는 ‘과학자’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마다 절감한다. 그는 이치를 꿰뚫은 마음의 과학자, 영성의 과학자다. 당시 유대의 전통적 가르침은 이런 식이다. “살인하지 마라”“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마태복음 5장21절) 그런데 예수의 문법은 달랐다. 그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복음 5장22절)고 말했다. ‘아니, 형제가 함께 자라다 보면 싸울 수도 있는 거지. 어떻게 형제에게 화를 몇 번 냈다고 재판에 넘겨진다는 걸까.’ 그뿐만 아니다. 예수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복음 5장22절)고 했다. ‘세상에, 그럼 감옥에 안 가는 사람이 없겠네.’ 이런 생각이 절로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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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의 ‘산상설교’. 유대인 복장을 한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하고 있다. 갈릴리 일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예수의 표현이 과격한 게 아니다. 그는 단지 ‘마음의 이치’를 강조했을 뿐이다. 예수의 메시지에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내 몸에서 침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입 안에 침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고인 침을 상대방에게 뱉는다. 누군가에게 화를 낼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내 안에서 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아서 상대방에게 쏟아낸다. 미움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독기가 마찬가지다. 먼저 내 안에 모아서 상대방에게 뿜어낸다.

그럼 내가 만든 독기의 1차 소비자가 누구일까. 상대방일까, 아니면 나일까. 그렇다. 나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야!”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미움으로 가득 찬다. “멍청이!”라고 불을 뿜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불지옥에 떨어진다. 그렇게 재판에 넘겨진다. 마음의 과학에 따라 ‘자동 재판’을 받게 된다. 그게 이치다.

독기만 그런 게 아니다. 자비도 마찬가지다. 자비를 베풀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내 안에서 자비심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모아야 한다. 그 사이에 내 마음이 젖는다. 내가 만든 자비심에 내가 먼저 젖는다. 그 온기와 배려와 사랑의 감정에 내가 먼저 잠긴다. 그게 마음의 이치다. 예수는 그걸 명쾌하게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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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안 작은 연못에 있는 조각. ‘목마른 이들은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의 안으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장37절)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팔복교회 안에 조그만 기념품점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회에서 만든 물건들도 있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베들레헴의 마구간도 있고, 올리브 오일과 대추야자도 있었다. 나는 대추야자를 하나 샀다. 점원은 “메마른 사막에서 자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라고 했다. 일반 대추보다는 조금 더 컸다. 꿀에 절여져 있어 맛이 괜찮았다.

궁금했다. 그토록 삭막한 사막에서,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야자수는 어떻게 열매를 맺을까. 점원은 “야자수 뿌리를 찾아보라”고 했다. 야자수 밑동을 보면 예닐곱 개의 뿌리가 아니라 털보 수염처럼 생긴 수천 개의 뿌리가 달려 있다. 야자수 한 그루가 1년에 뻗어내리는 뿌리의 개수는 약 5000개라고 한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뿌리는 땅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내려갈 것이다.

가게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야자수는 왜 그토록 많은 뿌리를 뻗는 걸까. 그건 간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을 축이고, 자신의 삶을 적셔줄 물 한 방울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광야다. 삭막한 사막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뿌연 모래뿐이다. 모래 바람은 수시로 몰아친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일은 물론이고 모레도, 글피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향해 발을 떼야 하나.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런 삶의 사막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은 나침반이다. 내 안의 물줄기를 찾아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할지 일러준다. 캄캄한 밤, 하늘의 별처럼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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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구스타프 도레의 ‘산상설교’. 예수의 메시지가 사람들 마음속의 어둠을 물리고 있다. 도레는 성서를 소재로 한 판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깨끗한 마음’을 설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 5장8절)

예수의 표현은 갈수록 직접적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땅을 차지하다가, 드디어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걸 가능케 하는 ‘깨끗한 마음’이란 뭘까. 그리스어로는 ‘카타로스(Katharos)’다. ‘카타르시스(Katharsis)’와 어원이 같다. 뭔가를 씻어내리는 거다. 그게 깨끗한 마음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수시로 샤워를 한다. 수시로 때를 씻는다. 그런데 돌아서면 때가 끼인다. 자고 나면 또 때가 끼인다. 몸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음도 그렇다.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씻어내려도 때가 끼인다. 잠시 눈만 돌려도 때가 끼인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쯤 온전하게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될까. 우리는 언제쯤 하느님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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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크라나흐의 1528년작 ‘마르틴 루터’. 가톨릭 사제였던 루터는 사제복을 벗고 16세 연하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그녀 역시 가톨릭 수녀였으나 수녀원을 탈출해 종교개혁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세간의 화제였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의 주인공이다. 종교개혁가가 되기 전에 루터는 가톨릭 사제였다. 수년 전에 독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루터가 가톨릭 수도자로 살았던 곳이다. 수도원에는 루터 당시 고해성사를 하던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10~20m쯤 떨어졌을까. 야트막한 계단이 하나 있었다. 그 계단의 별명이 ‘루터의 계단’이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열정적인 수도자였다.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한 뒤 방을 나왔다. 걸어서 계단까지 가다가 급하게 뛰어서 되돌아왔다. 방을 나와 계단까지 가는 사이에 또 마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되돌아온 루터는 다시 회개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계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란 돌아서면 때가 묻고, 돌아서면 때가 묻는다. ‘깨끗한 마음’이 되어서 하느님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종종 ‘거울’에 비유한다. 중국의 『육조단경』에는 ‘마음과 때의 관계’를 놓고 두 수도자가 벌이는 한판 승부가 담겨 있다. 선(禪)불교사에서 유명한 장면이다. 달마의 법맥을 잇는 오조(五祖) 홍인 대사가 시험 문제를 냈다. “게송(깨달음의 시)을 한 수씩 지어라.” 제자들의 안목을 보고 깨달음의 문턱을 넘은 자가 있으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다. 훗날 중국 북종선(北宗禪)의 대표 주자가 되는 신수(神秀, 606~706)가 먼저 답안지를 냈다. 그는 거울과 때에 대해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거울에 때가 끼이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신수의 안목에는 ‘마음’이란 거울이 있고 그 위에 먼지가 쌓인다. 루터의 방식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털고, 또 털고, 또 터는 식이다. 깨끗한 거울이 드러나게끔 말이다. 홍인 대사는 그 답안지를 보고서 이렇게 채점했다. “범부는 여기에 의지해 수행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는 않겠다. 그러나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문 앞에 왔을 뿐,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낙제’는 면했지만 ‘합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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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혜능. 중국의 마오 쩌둥(毛澤東)도 혜능의 열혈팬이었다. 혜능의 가르침을 담은 ‘육조단경’을 탐독하곤 했다.


당시 행자(승려 견습생) 신분이던 혜능(慧能, 638~713)도 답안지를 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이렇게 적었다. ‘마음의 거울은 본래 깨끗하다. 그러니 어느 곳에 먼지로 물들 것인가!” 혜능은 아예 ‘거울’을 깨버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울의 형상’‘마음의 형상’을 깨버렸다. 그는 왜 거울을 깼을까. ‘마음’은 몸뚱아리(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의 몸’을 만들어 놓고 먼지가 쌓인다고 착각을 한다. 그래서 혜능은 그 착각을 깨버렸다.

홍인 대사는 혜능의 답안지도 채점했다. 결과는 합격. 혜능은 홍인 대사의 뒤를 이어 중국 선불교의 법맥을 잇는 육조(六祖)가 됐다. 신수의 방식으로는 ‘깨끗한 마음’이 되기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먼지가 끊임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혜능의 방식은 다르다. 그는 먼지의 정체부터 뚫었다. 먼지가 뭔가. 지저분한 마음이다. 혜능의 눈에는 ‘지저분한 마음’도 마음이고, ‘깨끗한 마음’도 마음이다.

혜능은 ‘마음의 속성’을 깊이 들여다 봤다. 마음이 뭔가. 빈 자리에서 나왔다가, 잠시 작용하고, 다시 빈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마음은 작용만 할 뿐 비어있다. 그게 마음의 정체다. 그러니 혜능의 눈에는 마음도 몸이 없고, 먼지도 몸이 없다. ‘빈 곳’에 ‘빈 것’이 묻을 수가 없다. 그걸 깨칠 때 비로소 ‘깨끗한 부처님 나라(淸淨佛國土)’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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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팔복 기념 교회를 세웠다가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됐다. 현재 팔복교회는 1939년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세웠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였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20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다. 예수에게도 ‘나’가 없고, 바울에게도 ‘나’가 없다. 그게 ‘무아(無我)의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을 향해 모든 걸 내맡기는 것이다. 슬픔의 감정도, 기쁨의 감정도 내던져야 한다. 두려움도, 분노도, 영광도 남김없이 내맡겨야 한다.

시상식장에서 큰 상을 받을 때 사람들은 “이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한다. 그저 겸손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내가 영광을 움켜쥐면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 내맡기는 거다. 그렇게 던지는 순간, 내 마음이 깨끗하게 포맷되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은 그걸 ‘전적인 위탁(Total Commitment)’이라 부른다. 그런 ‘무아의 영성’을 통해 ‘없이 계신 하느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강하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셨으니까. 그런데 굳이 ‘깨끗한 마음’이 왜 필요한가?” 이렇게 따진다. 과연 뭘까.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의미는 대체 뭘까.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미국 드루신학대 석좌교수) 박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아주 존경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 대신 그동안의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했다. 어느 세대나 축복이 있고, 저주가 있다.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저주는 바로 ‘예수 결핍 장애’다.”

스윗 박사는 결핍을 채우려면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맛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느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ㆍ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ㆍ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

세계관이나 교리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는 굳이 ‘산상수훈’을 설하지 않았을 터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관점’을 설하지 않았다. 삶의 사막에서 허덕대는 우리의 목을 축여주는 건 ‘관점’이 아니다. 대신 예수는 생수를 건넸다. 마음의 버튼을 누르고, 마음이 작동하게 하는 ‘진짜 물’이다. 거기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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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바깥의 도로다. 이 길을 따라 3㎞ 정도 가면 갈릴리 호숫가에 ‘오병이어’ 교회가 있다. 예수 당시에는 오솔길을 걸었겠지만, 주위 풍경은 비슷했을 터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보챘다. 하느님을 보게 해달라고 예수에게 졸랐다. 빌립은 예수에게 이렇게 매달렸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복음 14장8절) 그런 제자에게 예수는 말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걸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14장10절) 예수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손으로 만져야, 귀로 들어야, 눈으로 봐야만 믿는 제자들 앞에서 말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도 공격적인 물음을 던졌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가?”(누가복음 17장20절) 그들은 따지듯이 물었을 터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오는지, 어디로 오는지 말이다. 이들의 물음에 예수는 ‘종말론’으로 답하지 않았다. “OOOO년 0월 0일 0시 하느님 나라가 온다. 그때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예수의 답은 오히려 뜻밖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장21절)

사람들 반응은 어땠을까. 맥이 빠졌을까. 아니면 실망했을까. 그도 아니면 말문이 막혔을까. 그런데 예수의 대답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답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그걸 찾는 게 우리의 몫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담은 많은 글 조각들이 있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이에 대한 수집과 선택, 그리고 배제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도마복음’은 4복음서에서 제외됐다. 복음서 중에서도 초기에 제작됐다는 문헌이지만 정경(正經)에서 빠졌다. 지금도 그리스도교에서는 ‘도마복음’을 ‘외경(外經)’이나‘위경(僞經)’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도마복음’에도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예수가 답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장면과 똑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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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의 1890년작 ‘산상설교’.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오는 사람들 행렬이 갈릴리 호수까지 이어져 있다. 그림에서 예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의 목소리가 보인다. 브룩클린 박물관 소장.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하면 하늘을 나는 새가 너희보다 먼저 닿을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는 것이라면 바다 속의 물고기가 너희보다 먼저 닿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그때는 아버지도 너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곧 자신이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러니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옛 선비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추운 겨울을 뚫고 올라오는 꽃, 지조와 기품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선비들은 매화를 찾아나섰다. 세상 어딘가 ‘가장 먼저 핀 매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산을 헤매고, 계곡을 헤매도 매화는 없다. 결국 지쳐버린 선비는 포기한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란다. 자신의 집 뜰에 매화가 피어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다. 밖에서 찾으려면 막막하다. 모세가 올랐다는 시나이산으로 가야 할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언약의 궤를 놓아둔 성전의 지성소로 가야 할까. 그도 아니면 히말라야 산의 깊숙한 골짜기로 가야 할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안에서 매화가 필 때 나의 바깥에도 매화가 핀다. ‘도마복음’은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밖에 있다”고 했다. 내 안의 천국을 찾을 때 바깥의 천국도 보인다.

예수는 ‘평화’의 뜻도 짚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장9절)

통(通)하면 평화가 있고, 통하지 않으면 평화도 없다. 남북 관계도 그렇고, 종교간에도 그렇다. 서로 통할 때 비로소 평화가 온다. 그러니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뜻이 뭘까. ‘통하는 사람들’이다. 무엇과 통하는 걸까. 신의 속성과 통하는 거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진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예수의 말도 그렇다. 거기에는 차단벽이 없다. 하나의 속성이 안팎으로 터져 있다. 서로가 서로를 공유한다. 인간이 신을, 신이 인간을 공유한다. 그래서 예수는 신을 품은 인간이자, 인간을 품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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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정원에 있는 라틴어 팻말. 붉은 꽃 아래 팔복 중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대목이 새겨져 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10절)

이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순교’를 떠올린다. 그런데 진정한 순교가 뭘까. 이교도의 땅에서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게 순교일까. 그것만이 ‘의로움 때문에 당하는 박해’일까. 예수의 메시지는 그보다 더 깊은 곳을 찌른다. 예수는 신의 속성을 공유할 때, 그렇게 평화를 이룰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마음의 눈을 돌려라!)”라고 외쳤다. ‘나의 눈’을 ‘예수의 눈’으로 돌려라,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라는 뜻이다.

그렇게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고통이 생긴다. 왜 그럴까. ‘나의 눈’을 무너뜨려야 하니까. 나의 고집, 나의 집착, 나의 욕망이 무너져야 하니까. 그런 고통이 바로 ‘박해’다. 때로는 나의 안에서, 때로는 나의 밖에서 밀려온다. 그게 박해다. 그런 박해를 통해 우리는 의로움(신의 속성)을 찾아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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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의 팻말 위에 돌멩이가 하나 얹혀져 있다. 유대인들은 묘지를 찾을 때도 꽃 대신 돌을 놓는다.


팔복교회를 나왔다. 멀리 갈릴리 호수 위에 노을이 떨어졌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새긴 팻말 위에 돌멩이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는 유대인의 묘역이 있다. 돌로 된 관마다 돌멩이들이 놓여 있다. 유대인들은 꽃 대신 돌을 놓는다. 팔복의 일곱 번째 메시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 팻말 위에도 누군가 돌멩이를 놓아 두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았을 터이다. 어떤 기도였을까. 자신의 삶에서 어떤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도를 했을까. 나도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웠다. 팻말 위에 얹었다.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온다. 예수가 묻는다.
 

네가 찾는 삶의 평화는 무엇인가? 너는 어떤 평화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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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에 황혼이 깃들었다. 하늘이 호수에 물들고, 호수가 하늘에 물들었다.


<9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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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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