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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억원 챙긴 공무원, 항공편으로 한국 우유 공수해 먹어”

중앙일보 2016.03.08 01:35 종합 14면 지면보기
#중국 지방 정부의 청장급 간부 사무실로 기업인이 찾아왔다. 청장과 안면이 없던 기업인은 자신이 추진하는 사업을 승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청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기업인이 백지 한 장을 꺼내 ‘3000萬(만)’이라고 쓰고 청장의 책상 위로 내밀었다. 3000만 위안(55억원)을 대가로 주겠다는 의미였다. 청장은 가로젓던 고개를 아래 위로 끄덕였다. 그러자 기업인은 백지를 들어 입에 넣더니 삼켰다. ‘증거 한 점 안 남길 테니 믿어 달라’는 뜻이었다. 청장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업인은 뜻대로 일을 이뤘고 약속한 돈은 청장의 손으로 건너갔다.

중국 산시성 서기, 부패 사례 보고
‘55억원’ 상납 약속 받고 사업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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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중국 산시(山西)성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의 산시성 대표단 회의에서 왕루린(王儒林·사진) 산시성 서기가 직접 소개했다. 청장급 간부는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왕 서기는 “이런 식의 부패는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을 무너뜨린다. 능력이 있는 기업이 아니라 뒷돈을 뿌리는 기업이 자원을 얻게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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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다른 사례도 소개했다. 산시성 산하 금융기관 책임자는 기업에 대출해 줄 때마다 대출금의 2%를 자문료로 요구했다. 자문료는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 계좌로 입금됐다. 그는 또 다른 은행 계좌로 기금을 설립해 돈을 모으고는 그 자금을 자신의 회사가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했다. 그는 모두 12개의 회사를 세워 3억9000만 위안(720억원)을 챙겼다.

 그는 회사 명의로 해외에서 전용 비행기를 사 굴리는 등 호화판 생활을 즐겼다. 그가 장기간 마신 우유는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공수(空輸)한 우유였다. 중국 부유층 사이에선 2008년 발생한 멜라닌 파동 등의 영향으로 자국산 우유에 대한 불신이 심하다. 남양·매일유업 등 한국 우유업체는 인천항을 통해 선박으로 완제품 우유를 중국에 보내는데 1~2일이면 도착한다. 1L에 39위안(7200원)으로 한국의 2~3배 수준이지만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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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서기는 최근 낙마한 부시장 사례도 소개했다. 부시장이 어느 날 베이징에서 마음에 드는 별장을 발견했다. 시세는 1000만 위안(8억5000만원)을 넘었다. 그는 한 기업인을 불러 돈을 지불하게 하고 별장을 구입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받은 뇌물은 모두 6억4400만 위안(1200억원)에 달했다. 왕 서기는 “부시장이 받은 뇌물은 산시성의 가난한 현(縣) 9곳의 연간 재정 수입을 넘는 액수”라고 말했다.

왕 서기가 소개한 이야기들은 중국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던 사례다. 중국 최대의 석탄 산지인 산시성은 최근까지 석탄 특수로 호경기를 누렸고 인허가권을 쥔 지방 정부 간부들도 덩달아 ‘좋은 시절’을 보냈다.

특히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시절에 큰 권력을 누렸던 링지화(令計劃) 전 중앙판공청 주임의 일가족과 측근들이 석탄 이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부패 사실을 뻔히 보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2014년 9월부터 올 1월까지 산시성 내에서 2만8668건의 부패 사건이 적발돼 3만1164명이 처벌 또는 처분을 받는 등 성 정부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홍역을 치렀다. 왕 서기는 “부패가 산시성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정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 체제 출범 이후 강도 높은 부패와의 전쟁이 4년째를 맞았지만 반(反)부패는 올해 전인대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키워드다. 그만큼 부패의 뿌리가 깊다는 뜻이다. 전인대 개막 전날인 4일에는 랴오닝(遼寧)성 서기를 지낸 거물 왕민(王珉)의 부패 혐의가 공표돼 베이징에 모여든 3000여 명의 대표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서울=구희령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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