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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정복할 것인가, 정복당할 것인가

중앙일보 2016.03.08 00:15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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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유로존 최대 은행 산탄데르의 본사를 2011년 말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마주친 안내 로봇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방문객이 오면 약속장소까지 길을 안내하는 단순한 기능의 로봇이었는데,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로봇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신기했다. 그로부터 불과 5년 만에 프로기사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I) ‘알파고(AlphaGo)’가 벌이는 세기의 바둑 대결, 다시 말해 인간 두뇌를 위협하는 기계의 존재를 서울 한복판에서 목격하게 됐다.

손님을 맞는 산탄데르의 안내 로봇이나 타월 같은 용품을 객실까지 배달하는 호텔의 버틀러 로봇처럼 기계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기만 하면 좋으련만 이미 기계의 지능은 난공불락이라던 바둑 최고수의 자리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노동 같은 단순 업무만이 아니라 고도의 판단이 필요한 자리까지 기계에 내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앞두고 저마다 승패를 점치기 바쁘지만 AI 전문가들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런 이유다. 설령 이번 대국에서 이세돌이 완승을 거두더라도 알파고는 수학공식만으론 풀 수 없던 고수의 통찰력을 학습해 이를 데이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알파고가 입신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잡고, 곧이어 다른 분야까지 정복하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기계에 밀려 일거리를 잃고 정복당할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까. 이런 비관적 시각만 있는 건 아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했던 ‘상상력’은 아직 인간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논리는 A에서 B까지만 갈 수 있지만 상상력은 어느 곳이든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나.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 애플 동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은 개발자가 하고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다 하는데, 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너를 천재라고 하느냐”며 잡스에게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잡스는 답한다. “너희는 뛰어난 연주자지만 난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라고. 비록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하나도 없지만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완벽한 지휘자가 된 잡스에게서 기계를 대하는 인간의 미래를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계와 겨루는 게 아니라 기계를 다루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말이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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