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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김종인, 더민주의 대북관 통째 바꿔라

중앙일보 2016.03.07 00:53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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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열 살배기 소년 김종인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맺혔다. 할머니 연일 정씨의 참혹한 죽음 때문이다. 할머니는 1950년 9·28 수복 직후 전북 순창에서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가인 김병로) 밑에서 자란 종인인 만큼 할머니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

당시 인민군은 “판사들은 남반부에서 혁명활동을 해온 동지들(간첩)에게 사형을 선고한 자들”이라며 색출에 혈안이었다. 판사를 잡지 못하면 배우자나 자식을 대신 죽였다. 친일파 처단과 토지개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가인도 초대 대법원장 지위 탓에 인민군의 타깃이 됐다. 패주(敗走)길에 순창에 들이닥친 인민군은 그를 찾지 못하자 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금도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의 얼굴은 굳어진다. 그는 남북 비핵화 합의를 끌어낸 노태우 정부에서 수석을 지냈다. 북한 문제는 이성(理性)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핵실험 같은 중대한 도발에도 눈을 감고 대화에 매달리는 건 그의 체질에 맞을 수 없다.

“소련이 핵 없어 무너진 게 아니다” “언젠가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것” “개성공단 폐쇄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

더민주의 오랜 대북관을 확 뒤집은 김종인의 발언들이다. 북한에 대한 본인의 체험과 소신이 집약된 고도의 메시지로 봐야 한다. 임동원 등 더민주의 대북노선을 좌지우지해온 햇볕주의자들로선 “김종인은 물러나라”며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꿈쩍할 김종인이 아니다.

더민주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아무리 ‘안보 정당’을 외쳐도 국민이 믿지 않는다는 거다. 당연하다. 의원들 상당수의 대북관이 국민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도 북한 체제에 문제가 많다고 보지만 그 이면에는 평양을 고립·압살하려는 외세의 책임도 크다고 믿는다. 북한을 악마화하는 보수 프레임을 따라가면 반공과 한·미 동맹에 기반한 기득권 구조를 영영 넘어설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 때문에 핵 개발, 3대 세습, 인권탄압 등 북한의 어떤 잘못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속내를 국민이 모를 리 없다. 문재인이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고 외쳐도 그 진정성을 믿는 국민을 찾기 힘든 까닭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극우세력의 북한 붕괴론이나 전쟁 불사론을 거부한다. 동시에 반인륜적인 북한의 만행과 도발에 면죄부를 주는 것도 반대한다. 더민주는 독재시절엔 색깔론으로 북한에 대한 모호한 입장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심화되고 북한의 ‘팩트’가 드러나면서 색깔론은 힘을 잃었다. 천안함·북방한계선(NLL) 논쟁에서 판판이 깨진 건 그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새누리당은 선거 때마다 어부지리를 챙겼다.

김종인의 등장은 이런 불리한 구도를 깰 절호의 기회를 더민주에 줬다. 이참에 더민주는 북한에 대한 입장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북한을 포용해온 당의 기본노선을 포기하란 게 아니다. 그런 기조는 유지하되, 도발엔 단호히 대처하고 인권문제에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 진정한 진보의 자세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수권의 문이 열린다.

영국 노동당수 토니 블레어는 당이 80년간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국유화’ 정강을 한칼에 날려버렸다. 1918년 이래 당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폐기한 것이다. 진보학자 에릭 홉스봄이 ‘바지 입은 대처’라고 공격했지만 블레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도 당내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성장 담론을 도입했다. 두 사람은 이런 극약처방으로 당을 옥좨온 시대착오적 족쇄를 벗겨냄으로써 대처와 레이건이 구축한 보수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했다.

김종인도 당내 강경파가 뭐라고 하든 말든 북한에 대한 소신을 밀어붙일 것이다. 집권하려면 국민 눈높이에 맞는 대북정책 외엔 답이 없다고 결단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안철수다. 호남을 의식해 대북제재 국면에서도 막무가내로 햇볕정책을 옹호하는 바람에 합리적 대안세력의 지위를 더민주에 뺏겨버렸다. 이제라도 안철수는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의당은 ‘호남 자민련’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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