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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테·방·법, 3수 끝에 성형수술 받고 태어났어요”

중앙일보 2016.03.03 02:52 종합 8면 지면보기
저는 ‘테·방·법’입니다. 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테러방지법’이죠. 근데 사실 이건 예명이고요, 본명은 좀 깁니다. ‘국민 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

테러방지법 통과, 기구했던 15년

 제가 오늘(2일) 드디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우여곡절”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법안(案)이 아닌 법률로서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겁니다. 3월 2일, 생일을 맞기까지 말도 탈도 많았던 저의 지난 15년 사연, 한번 들어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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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중(胎中) 15년=제가 잉태된 건 2001년. 김대중(DJ) 정부 때였습니다. 당시 국가정보원이 정부입법으로 저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죠. DJ 정부는 ‘인권 강화’를 표방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환으로 국가인권위원회도 대통령 직속으로 뒀을 정도니까요. 이러다 보니 테러에 국한해서라지만 국정원에 수사권을 주자는 저를 인권위가 두고 볼 리 없었습니다.

 결국 첫 출생기회를 놓쳤습니다. 저는 2003년까지 국회에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저를 국회 정보위원회 문턱까지 넘게 해줬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단계에서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이 “테러업무는 법무부가 맡아야 한다”며 국정원을 견제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 집안싸움에 저의 출생 기회는 또 한번 물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본회의 통과는 ‘삼수(三修) 출생’인 셈인데… 기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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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구한 팔자=사실 제 팔자 자체가 기구합니다. 끔찍한 테러가 발생해야 주목을 받았죠. 2001년 DJ 정부가 저를 만든 원인부터가 미국 9·11 테러였습니다.

2004년에도 여당(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저의 법제화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한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 직후였죠.

 19대 국회 첫해 2013년에도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 등이 저를 여러 이름으로 발의하고, 지난해 2월에도 이병석 의원이 저를 약간 손봐 국회에 냈습니다. 하지만 주목을 끌진 못했죠. 커다란 테러사건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마크 리퍼트 미국대사 테러(지난해 3월) ▶130여 명이 숨진 이슬람국가(IS) 파리 테러(지난해 11월) 등이 터지자 정치권은 허겁지겁 저를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결국 9·11로 잉태되고 IS 때문에 출생한 ‘불행아’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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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바뀔 때마다 수술=제가 태어난 이유는 명확합니다. “한국에서 테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동안 정부 테러예방활동의 근거라곤 ‘국가대테러활동지침’이란 대통령훈령(1982년 제정)밖에 없었거든요. 제가 나옴으로써 ▶테러 위험인물에 대한 정보수집 ▶이들에 대한 처벌을 위한 제대로 된 근거가 마련됐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옵니다.

 물론 저한테 “인권침해 요소를 품고 있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번에도 ①통신감청권 ②금융정보수집권 ③대테러조사 및 위험인물 추적권을 국정원에 주는 것 때문에 “테러방지 명분으로 포장된 국민감시법”(정의당 김제남 의원)이라고 욕을 먹었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필리버스터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며 장장 무박9일간 제가 세상에 나오는 걸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를 먼저 세상에 내놓으려 했던 건 DJ·노무현 정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정부의 후신인 더민주는 이번에 192시간이나 필리버스터를 하며 저를 막아섰죠. 새누리당도 이런 면에선 마찬가지입니다.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 1·2차 정부입법으로 발의된 저를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 한나라당의 “국정원의 비대화를 용납 못한다”는 주장은 정확히 지금 야당 논리입니다. 이쯤 되니 ‘나의 진짜 부모는 누구인가’ ‘모두 나를 정쟁의 소재로만 쓴 게 아닐까’ 하는 실존적 고민(?)이 밀려오네요.

 아무튼 여야가 오락가락하며 저를 주물럭거린 통에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수차례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컨트롤타워인 대테러대응센터를 국정원 산하에 설치하자고 했다가 국무총리실 산하로, 다시 국정원에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계속 수정돼온 거죠. 결국 대테러대응센터는 총리실 산하에 두도록 됐습니다. 그 위에 대테러위원회(위원장 총리)도 신설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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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통’이 더 걱정=이제 저는 요식행위인 국무회의 의결, 관보게재 절차만 거치면 진짜 법률이 됩니다.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반쪽의 시각은 여전히 싸늘합니다.

한 전문가는 “테방법이 시행돼도 곳곳에서 피해 사례들이 알려지면 입법보완 요구가 거세질 것”(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종철 교수)이라고 전망하더군요. 성장통, 그게 더 걱정입니다.

남궁욱·박유미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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