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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독립투사들에게 맛난 것 사줘"…86세 할머니 3000만원 기부

중앙일보 2016.02.2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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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 사는 86세 할머니가 3000만원을 인출해 대구지방보훈청 측에 입금한 은행 '입금증'. [사진 대구지방보훈청]

경북 상주시 시골마을에서 홀로사는 86세 할머니가 3·1절을 앞두고 3000만원을 대구지방보훈청에 전했다. 이름 밝히길 거부한 할머니는 돈을 전하면서 단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독립투사 같은 나라 위해 힘쓴 국가 유공자들에게 따뜻한 것, 맛난 것을 대신 사주라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 같은 봉사단체에서 고령자 기부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를 위한 86세 할머니의 고액 기부는 매우 이례적이다.

대구지방보훈청은 거동이 불편한 독립투사 등 지역내 1100여명의 국가유공자를 상대로 할머니의 돈을 어떻게 쓸지 설문조사를 진행 중이다. 3·1절 후 곧바로 설문 결과를 토대로 반찬 같은 기부 물품을 구입해 나눠 줄 예정이다. 아예 '상주 기부 할머니'라고 기부 사업명을 정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3000만원에 대한 사연은 이달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지방보훈청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경북 상주시 한 시골마을 와서 같이 은행에 좀 가달라는 할머니의 전화였다. "왜 그러냐"고 직원들이 물었지만 무조건 오라고만 했다. 직원들은 할머니 집을 찾아가 같이 은행에 갔고 통장에서 3000만원을 인출했다. "기부하지 말고 할머니 용돈으로 쓰시라"고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을 빼고 나니 할머니의 통장 잔고는 0원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난하고 외로운 독거노인이었다. 공상군경 유족이기도 했다. 남편은 1988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자녀는 2남2녀가 있었지만 해외 입양을 보내거나 행방불명이 돼 딸 하나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런데 이 딸 마저 1996년 육군 복무 중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혼자가 된 할머니는 매달 대구지방보훈청에서 나오는 보훈 지원금 120여 만원으로 생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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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은 "할머니는 120만원을 받으면 60만원만 쓰고 나머지는 3000만원을 모으기 위해 저축을 하거나 장애인 단체 등에 매달 10만~20만원의 익명으로 기부를 하고 있었다"며 "왜 남을 돕느냐 물어보면 '더 어려운 국가유공자를 돕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는 말만 한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끝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구지방보훈청도 '상주 기부 할머니'로만 기억하기로 했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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