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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도 안 통하네, 오늘 저녁 광화문광장‘유령집회’

중앙일보 2016.02.24 02:32 종합 1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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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울 북아현동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홀로그램 영상 촬영 현장. 80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촬영에 참여했다. [사진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신(scene) 1-2, 테이크 D1, 롤1, 액션!”

엠네스티, 집회 자유 보장 요구 시위

 지난 12일 서울 북아현동에 위치한 한 스튜디오에선 홀로그램 영상제작업체 대표인 양모 감독의 큐 사인(Q-sign)이 연신 울려 퍼졌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의뢰로 24일 ‘광화문광장 유령집회’에서 사용할 영상 제작이 한창이었다.

이날 230㎡ 규모의 지하 1층 스튜디오는 10여 개의 촬영용 조명과 함께 사방이 초록색 패널로 뒤덮여 있었다. 초록색 판을 배경으로 영상을 촬영한 뒤 편집 과정에서 배경색을 제거해 피사체만 남기는 ‘크로마키(chroma key) 촬영’ 기법이 구현되고 있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이러는 이유는 뭘까.

 앰네스티는 당초 지난달 25일 청와대 앞 청운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대한민국에서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집회를 열려 했다.

지난해부터 한국의 집회·시위 문화에 대한 모니터링을 펼쳐 보니 경찰의 강압성과 폭력성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해서다.

앰네스티는 “특히 지난해 11월 농민총궐기 당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며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자는 내부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집회 신고 이틀 만에 경찰은 “교통 혼잡을 유발할 수 있다”며 불허 결정을 내렸다. 앰네스티는 집회 불허에 대한 항의성으로 기존 집회와는 다르게 실제 사람이 아닌 ‘홀로그램’을 활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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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집회에서 사용되는 3D 홀로그램을 시연한 모습. 배경을 지우고 영상에 등장한 시민들의 모습만 모아 편집하는 크로마키 기법이 활용됐다. [사진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지난해 4월 스페인 시민단체인 ‘홀로그램 포 프리덤’이 공공시설 근처에서의 시위금지법안에 항의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세계 최초로 벌였던 홀로그램 집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앰네스티는 홀로그램 집회를 ‘유령집회’라고 명명한 뒤 지난달 28일 광화문광장조례에 따라 서울시에 문화제 신고 절차를 마쳤다.

영상을 통해 홀로그램을 구현할 뿐 실제 사람이 동원되거나 목적성을 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서 집회가 아니라 문화제라고 신고한 것이다.

 이날 유령집회 영상 촬영에는 앰네스티 홈페이지를 통해 참가 신청을 한 80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오후 2시부터 9시간 동안 가두행진, 모두발언, 구호 제창 등 실제 집회 현장을 재현해 영상을 촬영했다.

퇴근 후 곧바로 스튜디오를 찾은 직장인 이충효(29)씨는 “지난해 스페인 여행 중 우연히 홀로그램 집회를 현장에서 봤다”며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홀로그램 집회인 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3D 홀로그램을 활용한 유령집회는 24일 오후 8시30분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30분간 진행된다. 가로 10m, 세로 3m의 반투명 판에 사전에 촬영한 영상을 투영하면 10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진행하는 것과 동일한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앰네스티는 설명했다.

 경찰은 국내 최초의 홀로그램 집회에 대한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이다. 실제로 시민들이 모여 진행하는 집회가 아닐뿐더러 스크린에 영상이 투영되는 것이라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세부항목을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집회의 정의 자체가 ‘다수의 사람이 특정 목적으로 특정 장소에 모이는 행위’인데 홀로그램 집회는 영상만 나올 뿐 특정 장소도, 다수의 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의 고민은 크게 세 가지다. ▶홀로그램 영상을 집회로 볼 수 있는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영상을 상대로 자진해산 불응 등의 집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미신고 집회 혐의로 처벌한다면 대상은 누구로 해야 하는지다.

경찰은 일단 유령집회에 앰네스티 관계자와 시민 등 100여 명이 모일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에서 신고지역을 이탈하거나 구호를 제창하는 등의 돌발행동이 나오면 집시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1차적으로 단속할 계획이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집회가 아니라 문화제로 신고가 돼 있기 때문에 홀로그램 주변에 모여 있는 시민들이 박수를 치거나 함성을 지르더라도 미신고 집회에 동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홀로그램을 상대로 해산명령을 내리거나 영상에 등장한 시민들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낼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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