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효율보다 전통, 영국의 피지(皮紙)논쟁 마무리

중앙일보 2016.02.16 17:43
기사 이미지

1215년 작성된 마그나카르타 중 현존하는 네 개 본. 800주년인 지난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았었다.

영국 의회가 법안을 송아지가죽으로 만든 피지(皮紙·vellum)에 쓰는 전통을 이어가기로 했다.

최근 상·하원은 피지에 계속 법안을 쓸 지 여부를 두고 충돌했다. 상원은 “디지털 시대 변화에 맞춰 피지 대신 더 보관하기 쉽고 비용이 저렴한 종이를 도입하겠다”며 4월부터 피지 대신 고품질 종이를 쓰겠다고 결정했다. 연간 8만 파운드(1억4000만원)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원이 1215년 작성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등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들이 모두 피지에 기록됐는데, 그 전통이 깨질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종이의 보관 기간이 수백 년인데 비해 피지의 경우엔 수천 년 보관할 수 있다는 내구성도 강조했다.

언론이 뛰어들었고 사회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내각이 나섰다. 국무조정실 장관인 매트 핸콕이 “전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연간 8000파운드를 우리가 대겠다”고 했다. 그리곤 “피지에 적으면 수천 년을 보관할 수 있으니 비용면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라며 “급변하는 세상 속에 우리의 위대한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영국 BBC 방송은 이와 관련, “1984년부터 86년까지 BBC가 영국 전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여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데이터를 레이저디스크에 보관한 일이 있었다. 당시론 미래였지만 20년 후엔 그걸 읽을 수 있는 기계가 사라져 엄청난 노력을 한 후에야 데이터를 읽을 수 있었다. 디지털이 종이보다 손상되기 쉬울 수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상원이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내각이 정식 제안하면 다시 논의하겠다고 했다. 영국 언론들은 "피지 전통이 살아남았다"고 썼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