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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전관 vs 전관’ 대결…씁쓸한 1300억 라면소송

중앙일보 2016.02.16 00:04 경제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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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숙 경제부문 기자

“대법원의 흑역사로 길이 남을 최악의 판결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 한 간부의 말은 단호했다. 지난달 26일 대법원 판결을 두고 한 얘기다. 라면 값을 담합했다며 공정위가 오뚜기와 한국야쿠르트에 물린 과징금이 부당하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지난해 12월 농심도 대법원으로부터 같은 판결을 받았다. 공정위 손을 들어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깼다. 공정위가 이들 라면회사에 돌려줘야 할 과징금은 1300억원에 이른다.

 헌법에서 정한 최고법원인 대법원을 겨냥해 공무원이 하는 말 치고는 수위가 꽤 높다는 생각은 금방 잊혀졌다. 다른 공정위 관료로부터도 비슷한 발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에 대한 이해와 법리 해석, 담합과 정보 교환의 차이 설명에서 출발한 그들의 주장은 한 가지로 모아졌다. ‘전관의 힘’이다. 공정위 모 인사는 “라면 소송에 대법관 출신 세 명이 관여하는 게 말이 되냐”며 “전관예우의 위력”이라고 했다.

 민감한 심결을 주로 다루는지라 ‘말조심’ 하기로는 유별난 공정위다. 밖에 토로하는 내용이 이 정도라면 내부 분위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역시 전관 끗발이 최고라는 말이 번지고 있다. 이 말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무서운 사법 불신이다’란 책(『정의를 부탁해』 권석천 지음)의 구절이 공정위 안에서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들도 잠시 머뭇거리는 때가 있다. “공정위 출신도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나. 공정위 전관도 로펌에 많지 않나”란 질문이 나오는 순간이다.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나온 통계를 보면 국내 10대 대형 로펌에 몸 담고 있는 공정위 퇴직자는 46명에 달한다. 전직 공정위 관료는 로펌에서 변호사·고문·자문위원 같은 직함을 달고 활약 중이다. 지난 5년간 공정위가 패소한 기업 사건 55건 가운데 44건이 이들 로펌 담당이었다.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일은 더 씁쓸하다. 어느 편에 서도 결국 손해는 국민 몫이다. 공정위 판단이 맞다면 서민은 담합의 결과로 웃돈을 주고 라면을 사먹어 왔다는 얘기가 된다. 대법원 결정이 옳다면 하지도 않은 담합에 공정위가 과징금을 물려 나랏돈으로 소송 비용에, 이자까지 얹어주게 생긴 셈이 된다. 돌려주지 않는다면 고스란히 국고 수익으로 잡힐 돈이다. 공정위 간부의 ‘예언’ 대로 이번 판결이 대법원의 흑역사로 남을지, 아닐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 전에 공정위 전관이 만들었을 수많은 흑역사도 함께 곱씹어봤으면 한다.

조현숙 경제부문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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