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 편에 1000원짜리까지…대학로 점령한 저가 연극

중앙일보 2016.02.15 01:35 종합 21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저가 연극 ‘빅3’중 하나인 ‘옥탑방 고양이’ [사진 악어컴퍼니]


12일 저녁 서울 대학로 모 소극장. 남녀 두 명씩 4명이 출연하는 로맨틱코미디물이 공연 중이었다. 이 연극은 4년 전부터 이어져 온 롱런 작이다. 드라마는 다소 엉성했지만 땀까지 뻘뻘 흘리는 배우들의 열정에 관객 50여 명은 박수를 보냈다.

창작의 메카 대학로는 옛말
‘옥탑방 고양이’ ‘작업의 정석’ 히트에
저가 뒷골목 연극 2013년부터 확산
소극장 100여 곳 중 절반 1만원이하
‘1+1’ 티켓, 소셜커머스 덤핑도 한몫
출연료 회당 1만원대까지 낮아져
‘저가 → 저질 → 관객외면’ 악순환 우려


극이 끝난 뒤 엘리베이터를 탄 어느 남녀의 대화. “오빠, 좀 별로다 그렇지? 지난번에 본 ‘그남자 그여자’가 훨씬 나은 거 같아.” “그럼 1000원짜리인데 어련하겠니.”

 1000원? 이 연극은 소셜커머스 ‘쿠팡’에서 일주일 남짓 ‘1000원 폭탄 세일’로 판매 중이었다. 값이 싼 건 소비자로선 고마운 일. 하지만 공급자는 1000원에 팔아 과연 남는 게 있을까.

이 연극의 제작사 대표는 “누적 판매량이 높아야 소셜커머스 상단에 노출된다. 울며 겨자먹기지만 딴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제작자는 “평일 객석에 10명도 안 차는 경우가 숱하다. 차라리 1000원 덤핑이라도 파는 게 낫다”고 말했다.

14일 현재 소셜커머스에서 1000원에 판매되는 대학로 연극은 4편이었다. 대학로 연극의 공식 가격은 대략 3만원선이다. 하지만 “3만원 다 내고 보면 호갱 중의 호갱”이라고 한다.

 정가에서 통상 70% 이상 할인을 해 “1만원도 비싸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8000원 안팎에 실질 가격이 형성돼 있다.

 일부에선 정부의 ‘1+1’ 정책(메르스 영향으로 침체에 빠진 공연계를 지원하고자 2월 말까지 한 장을 살 경우, 한 장을 더 주는 것)이 가격 저하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1’ 예매사이트에서 대학로 연극의 평균 가격은 1만5000원. 즉 소비자로선 장당 7500원에 구입하는 꼴이다.

그러나 소극장연합회 정대경 이사장은 “소셜커머스가 득세하면서 1만원 마지노선은 이미 3년 전에 붕괴됐다”고 전했다.

가격 하락의 1차 원인은 공급과잉이다. 본지가 지난달말부터 보름가량 대학로 공연장 100여 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14일 현재 1만원 이하로 볼 수 있는 연극은 55개로 집계됐다. “1만원이면 사실상 대학로 오픈런 연극은 100% 볼 수 있다”(손상원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장)고 한다.

 과거에도 이른바 ‘뒷골목 연극’이라 불리는 저가 연극이 제법 있었다. 스토리·무대 등은 조악하지만 코믹함과 싼 가격으로 대중을 공략했다.

 
기사 이미지

저가 연극 '빅3'중 하나인 '작업의 정석' [사진 네오]

비주류로 치부되던 저가 연극이 대세를 이룬 건 2013년부터. 전용관, 일정정도 완성도, 높은 회전율 등으로 무장한 창작극 ‘옥탑방 고양이’와 ‘작업의 정석’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아류작이 급속히 양산됐다. 자연히 가격 전쟁도 치열해졌다.

대학로 한 제작자는 “2년 전 11명의 대학로 기획사 대표가 모여 ‘제 살 깎기 그만하고 최소 1만2000원은 지키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한달 만에 한 연극이 이를 깼다. 이젠 상도의고 뭐고 없다”고 전했다. 

직격탄을 맞은 건 출연 배우다. 저가 연극엔 통상 배우 4명이 나온다. 회당 출연료는 평균 2만∼5만원이다. 최근엔 1만5000원까지 낮아졌다.

 
기사 이미지

저가 연극 '빅3'중 하나인 '라이어' [사진 파파프로덕션]

한 출연자는 “배우라는 자존감보단 우리끼리는 ‘행사 뛴다’고 자조한다”며 “가난한 연극하다 설경구·송강호 같은 스타된다는 것도 옛날 얘기다. 이미 리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오디션 공고를 내면 보통 20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 ‘열정페이’를 감수하는 연기자 지망생들이 줄을 잇는다.

 ‘작업의 정석’ ‘죽여주는 이야기’ 등은 평일 4회, 주말 5회 공연한다. 심지어 동일한 공연장에서 다른 작품을 올리는 상황까지 연출된다.

설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정보소극장에선 오후 3시에 ‘사춘기 메들리’가 공연됐다. 종료시각은 4시30분. 곧이어 30분 뒤인 5시에 ‘연애는 괴로워’가 올라갔다. 무대는 똑같았고, 소품만 달라졌다.

제작자는 “낮엔 청소년을, 저녁엔 대학생을 타깃 관객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 극장 두 작품’이 올라가는 공연장은 9군데에 이른다.

 저가 연극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가성비 대비 만족한다”거나 “싼 게 비지떡” 등으로 엇갈린다. 실제 수익을 내는 작품은 다섯 손가락안에 꼽힌다. 가격 폭락-낮은 제작비-완성도 하락-관객 외면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정대경 이사장은 “실험정신이 넘쳐나는, 창작 산실이라는 대학로 역할은 이미 상실됐다”고 꼬집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바람잡이·PPL…저가 연극엔 꼭 있다

저가 연극의 90%는 코미디다. 막전막후 웃음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가 공식화됐다.

1. 닮은 배우 누구? “이 분위기 어떡해, 내 책임인 겨.” 불이 켜지면 출연진 한명이 무대 앞으로 달려 나온다. 분위기 메이커다. 어색한 객석 공기를 푸는 게 임무다. “저를 닮은 배우 맞춰보세요.” 이때 진짜 생각을 발설하는 이는 눈치 빵점이다. 남자에겐 강동원, 여자에겐 전지현이라고 해야 한다. 정답이 사실상 정해져 있다.

2. 경품행사와 PPL “자, 오른손 들어서 가위바위보 합니다. 같거나 진 분들은 내리세요.” 공연 직전 경품을 건 게임도 빠지지 않는다. 손쉬운 가위바위보가 일반적이다. “세상에 공짜 없죠.” 상품을 받은 이는 공연 중 애완견 등의 역할로 설정된다. 소리를 내기도 한다. “역시 빵은 3번 출구 뚜레XX”라는 식의 노골적인 PPL도 빠지지 않는다.

3. 포토타임 별다른 홍보수단이 없다. 관람후기가 절실하다. 공연이 끝나면 “블로그나 예매사이트에 글을 남겨달라”고 당부한다. 배우와의 포토타임도 이어진다. “사진을 찍고 싶으신 분들은 자리에 계시고요, 너희 따위와 기록을 남기기 싫다는 분들은 물구나무 서서 나가시면 됩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