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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지휘자는 억울하다

중앙일보 2016.02.15 00:44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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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8일(한국시간) 미국 수퍼보울 하프타임 쇼를 봤더라도 구스타보 두다멜은 기억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힘껏 지휘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수퍼스타 지휘자로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이날 록밴드 콜드플레이와 함께 연주하는 LA청소년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에너지가 폭발할 것 같은 특유의 제스처는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 몸짓이 단 2초만 나왔다는 거다.

 
 
(0분55초 쯤에 두다멜이 잠시 나온다. 전세계 클래식 연주홀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그가, 이렇게 초라하게 잠시 출연한다.)

 두다멜은 말 그대로 관객에 ‘파묻혀’ 있었다. 객석 중 의자 하나에 간신히 올라서 있는 듯했고 카메라는 그를 잠시 훑었다. 클래식 음악가가 이토록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세계에서 초청장을 받았다는 생경함은 2초 만에 끝났다. 저 사람은 뭘 하는 걸까 의아했던 시청자가 많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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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면은 예사롭지 않았다. 지휘자의 쓸쓸한 처지를 포착한 상징적 한 컷처럼 보였다. 지휘자는 혼자서 음표 하나도 연주를 못한다. 게다가 집에는 자신의 악기(오케스트라)도 없고 가끔 만나는 그 악기는 말을 심하게 안 듣기로 유명한, 예술가들이다.

 원로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는 어떤 영상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말했다.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음악가로서 영감을 한껏 보여줘야 한다. 지휘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름다운 표정을 짓는 정도밖에는.” 단원들은 폭소를 터뜨리지만 그 다음 말에서 뜨끔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좀 더 잘 표현해달라. 음들이 C음을 중심으로 연결된 것 말이다.” 더듬수를 빙자한 리더십이다. 무티는 하는 일이 없다는 엄살과 함께 사실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제각기 자기 소리만 내는 연주자들에게 전체 그림을 보여주는 일 말이다.
 
 
(리카르도 무티의 리허설 장면. 그는 “지휘자의 역할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돼간다”며 “회의감이 완전히 많아지면 그때 은퇴할 것 같다”고 말한다. ‘지휘자가 하는 일이 뭔가?’라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능청스러운 답변이다.)

 경험 많은 지휘자일수록 그림자 리더십을 발휘한다. 레너드 번스타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같은 명지휘자가 후배들에게 강조한 메시지는 한결같다. 과장 없는 동작으로 오케스트라에 정확한 사인을 주라는 당부는 대중의 시선을 가로채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후배를 가르치는 장면. 지휘자는 그러나 많은 일을 한다. 4분 12초부터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같은 부분이지만 학생이 연주할 때와 번스타인이 연주할 때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 된다.)
 
 
(지휘자의 역할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는 카라얀의 마스터클래스. 소리의 질감 자체가 지휘자에 따라 달라진다. 18세기 이후 오케스트라의 크기가 커지고 음악에 변수가 많아지면서 지휘자의 존재는 절대적이 됐다. 레코딩 기술의 발전과 공연의 상업화 등도 영웅적 지휘자 탄생에 일조했다.)

지휘자 조련사로 불리는 요르마 파눌라는 “지휘가 무엇인지 알아갈수록 동작은 간결하고 작아진다”고 했다. 그러니 지휘를 제대로 하면 무대에서 혼자 빛나기가 어렵다. 어쩌면 지휘자가 좀 억울해야 공연이 제대로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록밴드의 열성 팬들에 휩쓸리며 열심히 팔을 저어야 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보여주듯, 리더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마스터클래스. 2분45초부터 그는 손도 쓰지 않고 눈빛만으로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끌고 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와의 교감에 대해 ‘일종의 영적인 교감’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김호정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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