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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박운서 전 차관 10년전의 약속

중앙일보 2016.02.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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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발가락의 기적 2

지난 1월 5일 아침, ‘엄지발가락의 기적’이란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이 쓴 칼럼이었다.

칼럼을 읽으며 뭉클했다.
박운서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칼럼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통상산업부 차관을 역임했으며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사장, 데이콤 회장을 지냈다.
정년퇴임 후, 지난 10년간 필리핀의 오지 민도로 섬에서 봉사 활동을 해왔다.
15ha의 땅을 사들여 벼농사를 짓고, 그 쌀로 망얀족 아이들 밥을 먹이고, 교회 14곳을 세우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 그가 지난해 4월 19일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5월 2일 의식불명인 채로 서울로 후송됐다.
몇 달 동안 여기가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분간을 못하는 섬망증상에 시달렸다.
그가 의식을 찾았을 때 양쪽 무릎과 정강이에 철심이 박히고, 요도엔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도뇨관이 있었다.

오른 발은 엄지 발가락뿐이었다.
그는 하나 남은 엄지 발가락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마저 없었다면 목발을 짚고 서기도 어려웠을 것이라 했다.

그런 그가 민도로 섬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고 있다고 했다.
권석천위원은 ‘단순히 발가락 하나가 온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시 일어서서 봉사와 선교의 땅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기적’이라고 칼럼에서 밝혔다.

칼럼을 읽고 아침을 먹는 내내 그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그 칼럼을 읽었다.

그때 사진 한 장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전 필리핀 오지로 봉사활동을 하러 떠난다는 사람을 인터뷰한 적 있었다.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하자마자 회사의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칼럼을 두 번째 읽으며 스쳤던 그 사진, 딱 한 장이 있었다.
사진에 저장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사진제목; 박운서, 신문게재일;2005년 3월 29일, 매체; 중앙일보 인물면.
아침에 읽은 칼럼의 주인공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사진의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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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의 기억이기에 가물가물했다.
당시의 기사를 찾아 다시 읽었다.
사진과 기사가 기억을 다시 떠올려 주었다.

당시 그는 화려한 공직생활과 최고경영자의 이력을 뒤로한 채 남은 인생을 필리핀 원주민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 10년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땅을 구입하여 두레마을처럼 공동농장 운영하고, 학교와 예배당도 지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믿거나 말거나 일수도 있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는 날은 아주 추운 날이었다.
인터뷰 장소는 난방을 하지 않은 조그만 예배당이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장시간 인터뷰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날씨와 장소였다.
여느 사람이면 호텔 커피숍이나 따뜻한 장소로 옮기자고 했을 터이다.

그런데 그는 아랑곳없었다.
보다 못한 교회직원이 선풍기모양의 난로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인터뷰 내내 이야기한 요지는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남은 인생은 남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었다.
남을 위한 삶, 그것도 필리핀의 오지 원주민을 위한 봉사이니 쉽지 않은 의지였다.
추운데 손길이 따스하게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딱 십 년이었다.
10년 계획으로 떠난 그가 의식불명인 채로 한국에 돌아온 게….
그리고 칼럼으로 판단컨대 그는 10년 전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만나고 싶었다.
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싶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권석천 논설위원에게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후 연락이 왔다.
병원으로 와도 좋다는 답이었다.

조명 장비와 카메라를 챙겨 병원을 찾았다.
상의는 내복, 하의는 환자복 차림에 깡마른 그가 책을 보고 있었다.

인사를 드렸다.
그가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프린트해서 들고 간 사진을 보여주며 10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취재 기자가 난로 옆에 외투를 벗어 놓았는데 타버렸잖아요.”

“아! 그랬지. 하하. 그래, 잘 지냈소?”
사진과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를 기억해냈다.

10년 간의 봉사활동 이야기와 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가진 재주가 사진 찍는 재주뿐이니 사진 한 장 찍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병원으로 찾아 온 이유였다.

“영정사진하면 되겠네.”
“그런데 제가 영정사진이라고 찍으면 잘 안 돌아 가시더라구요.”
“그러면 더 좋지”하며 시원스레 웃었다.
그가 보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매일 죽는다』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을 검색해봤다. 세 번이나 쓰러지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까지 충성스럽게 사역한 이중표 목사의 고백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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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다.
믿음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의 믿음을 잘 모른다.
나 같았으면 지금의 처지를 원망했을 터이다.
그런데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서도 믿음을 이야기했다.

더구나 운신도 힘든 몸으로 그곳의 아이들을 염려하며 돌아갈 날을 손꼽았다.
“당장 급한 게 합동결혼식이야. 부모들 혼인신고가 돼야 아이들 출생신고를 할 수 있고, 그래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이건 10년 전에 그가 그랬듯, 스스로를 코 꿰는 자신과의 약속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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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으려면 내복 위에 셔츠를 걸쳐 입어야 했다.
링거 줄 때문에 옷 하나 걸쳐 입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간병하는 막내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얼굴 사진을 찍은 후, 발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우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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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발보다 유독 가느다란 오른 발, 여기저기 수술 자국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엄지 발가락 하나가 달랑 남아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다시 설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설 수 있으니 다시 가야 한다고 했다.

남을 위해 살겠다던 10년 전 그의 약속, 나는 반신반의했었다.
다시 가겠다는 지금 그의 약속, 나는 온전히 믿는다.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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