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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되 보이지 않는 것, 사랑의 신비

중앙선데이 2016.02.14 00:39 466호 14면 지면보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1649~51)



감각(Sensation)여름날 푸른 저녁에, 들길을 걸어가리라밀 잎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며 꿈을 꾸듯이 발끝에는 차가움을 느끼리맨 머리에는 바람이 감싸는 것을 느끼리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하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이 샘솟으리그러면 나는 집시처럼 멀리, 아주 멀리 떠나리자연 속으로-마치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아르투르 랭보, 1870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9- 랭보와 벨라스케스

시인 랭보는 초원을 가로 질러 걸어갔다. 틀이 잡힌 삶의 단조로움, 그 권태로움은 예술의 적이었다. 정형화된 도시의 삶이 강요하는 것이 밑창이 두꺼워져 감각을 잃은 관성이라면, 들길을 걸어가는 시인이 다시 발견하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지상의 행복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서 내뿜는 생생한 감각이다. 그 감각은 한마디로 푸르게 청량하고, 밀잎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기분 좋은 자극이고, 신선하게 차갑다. 모자를 벗어 던진 맨머리로 느끼는 선선한 바람의 자유. 어떤 판에 박힌 생각도 던져 버리고 집시처럼 자유롭게 떠다닐 것이고, 마음속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이 샘솟을 것이다.



스물여섯의 젊은 시인 아르투르 랭보(1854~1891)는 청춘의 생생한 감각, 그 행복을 “마치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as happy as if I were with a woman/ Heureux, comme avec une femme)”라고 표현했다. 알랭 드 보통이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언급해서 더 유명해진 이 문장은 시적인 매혹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은 누구나 하지만, 그 사랑은 모두 다르다. 사랑의 보편성과 은밀함을 꼭 집어 담아낸 문장이 바로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다. 그 여자는 특정한 여자가 아니다. 그냥 ‘한’ 여자다. ‘한’ 여자는 동시에 ‘모든’ 여자가 될 수 있다. 단발 머리 여자일 수도, 긴 생머리 여자일 수도 있다. 거기에는 누가 와도 되기에, 사랑을 해본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루벤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1615)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라고 노래한 랭보랭보의 이 한 문장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그림 ‘거울 앞의 비너스’를 언어로 압축해 놓은 것 같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필리페 4세(1605~1665)의 궁정화가였다. 스페인의 황금기는 저물고 있었다. 국제적 영향력은 약화되고, 계속된 근친 결혼으로 건강하지 못한 자손들의 탄생과 이른 죽음으로 쇠락의 분위기가 농후했다. 그런 궁정에서 예술은 국왕의 유일한 위로였다. 필리페 4세는 즉위하면서 벨라스케스를 직접 발탁했고, 그로 하여금 왕가 인물들의 면면을 그리게 했다.



왕의 총애와 믿음 속에서 벨라스케스의 일은 점점 많아졌고, 늘 격무에 시달렸다. 1649년에서 1650년 사이 그는 이탈리아로 간다. 그의 예술적 안목을 잘 알고 있던 왕이 좋은 이탈리아 미술작품 수집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출장 겸 휴가 겸 떠난 길이었지만, 이 이름난 화가는 여전히 바빴다. 저 유명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를 그렸고, 또 우리가 보는 ‘거울 앞의 비너스’를 그렸다. 가정 생활에서나 공무에서나 성실하기로 유명했던 벨라스케스에게 그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비너스상은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벨라스케스 이전에도 비너스는 숱하게 많이 그려졌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누워있는 비너스’로,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비너스는 ‘허영의 비너스’라고 불리는데, 도상학적 분류가 가능할 정도로 많은 화가들이 그려왔다.



벨라스케스는 이 두 도상을 매력적으로 합쳐 침대 위에서 거울을 보는 비너스를 그렸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는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붉은색 커튼이 관능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침대 위에서 등을 돌린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렸던 170cm 이상의 건장한 금발 비너스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비너스는 골반 뼈가 튀어나와 있다고 느껴질 만큼 야위고 키가 작다. 기존 비너스들이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이상적인 몸매에 근접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저 평범하고 자그마한 여인이다.



사실 비너스를 그렸던 모든 화가들도 비너스를 본 적이 없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림 속 여인이 비너스라는 것은 함께 등장하는 황금사과 같은 지물이나 큐피드를 통해 알 수 있다. 친절한 큐피드는 거울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비춰주려고 한다. 거울은 비너스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한 각도가 아니라, 관람객에게 비너스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각도로 놓여져 있다.



그러나 거울에 그 모습은 흐릿하게만 비친다. 보이되 보이지 않는 것. 가장 개인적인 것인데 가장 보편적으로 되는 것. 이것이 벨라스케스와 랭보가 말하는 사랑의 신비다.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아주 사적인 비너스다. 이 비너스는 제우스의 영광된 딸이자 올림푸스 12신이라는 공적인 여신이 아니라 유행가 가사 같은 ‘나만의 비너스’다.



같은 제목의 루벤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 그림의 매력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다. 루벤스의 비너스는 그 얼굴이 또렷하게 거울에 비치고 있다. 장밋빛 피부에 금발의 비너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도취된 듯 하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아름다운 비너스의 모습이지만, 여기에는 관람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반면 시선의 마술사인 벨라스케스는 관람객에게 상상의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사랑하라,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은 가장 은밀하고 가장 개인적인 감정이다. 누구에게나 이름과 얼굴이 있듯, 자기만의 사랑이 있다. 남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보고 울고 웃는 것은 그 사랑이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랭보는 그저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라고 노래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연인과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마법이다. 나만의 행복 동력으로, 나만의 마법으로 삶을 헤치고 나가는 것. 이것이 조로한 시인 랭보가 제시하는 살아가기 방식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맡던 냄새를 맡게 된다. 사랑은 감정·지성·감각·에너지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방을 향해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투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에는 ?권태?라는 이끼가 끼기 마련이다. 권태에 빠져들면 모든 것이 긴장감을 잃고, 관성적으로 되고, 삶은 지루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하기 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낼 수 있기에, 사랑은 주어진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을 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새봄엔 더 많은 사랑이 세상에 있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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