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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석화’ 조훈현, 한국 바둑 절정의 순간 맛보다

중앙선데이 2016.02.14 00:33 466호 26면 지면보기

1989년 조훈현(왼쪽)과 녜웨이핑이 응씨배 결승 제1국을 두고 있다. [한국기원]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응씨배(應氏盃) 세계대회 결승 5번기 최종국. 2대2로 맞선 상태에서 자리에 앉은 녜웨이핑(?衛平) 9단의 얼굴은 물기가 다 빠진 듯했다. 한숨도 못 잔 것이다. 그것은 조훈현 9단도 마찬가지. 조훈현의 흑으로 대국은 시작됐고 긴장감으로 대국장은 숨이 멎은 듯했다. 이윽고 승부가 났다. 늦은 오후 조훈현이 흑145를 두자 녜웨이핑은 돌을 던졌다. 조훈현이 세계 정상에 올랐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 당시 최대의 상금이었다.


[반상(盤上)의 향기] 한국 바둑과 응씨배

1970~80년대 일본 경제는 호황이었다. 연 4.5%를 성장했다. 그에 따라 바둑도 전대미문의 성장세를 이루고 있었다. 77년 제1기 기성전(棋聖戰)이 우승 상금 1700만 엔(2014년은 4500만 엔)으로 전통의 명인전과 혼인보전을 제치면서 최고의 기전으로 출발했다. 바둑 인구가 900만명을 넘었다. 세계 제일을 자부했다.



61년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은 바둑을 교류했다. 수준 차이가 현격해 일본이 압도적으로 앞섰다. 중국이 국가 바둑 집훈대(集訓隊)를 만든 73년에도 그랬다. 73년의 중국 성적은 14승 2빅 40패였다. 그것도 중국이 이긴 것은 대부분 아마추어들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76년 방일한 중국팀은 27승 24패 5빅의 좋은 성적을 끌어냈다. 특히 녜웨이핑은 혼인보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9단을 이겨 일본을 놀라게 했다.



85년 제1회 일·중 슈퍼대항전이 열렸다. 중국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녜웨이핑은 독보적이었다. 패한 나라는 계속해서 선수를 내보내는데 녜웨이핑은 혼자서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을 내리 이기면서 중국에 우승을 안겼다. 가토, 고바야시, 후지사와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삭발했다. 녜 9단은 이 세 판을 포함해 슈퍼대항전에서만 11연승을 했다. 1회와 2회 때 8연승을 했고 3회 땐 1승, 4회 땐 2승을 기록했다. ‘철의 수문장’이란 별칭을 얻었다.



대륙 출신인 대만의 부호 잉창치(應昌期)는 중국 바둑의 발전에 고무됐다. 비록 대만 바둑이 약하고 중국도 일본에 밀리지만 국가가 아니라 개인으로 시야를 돌리면 중국인이 세계 1인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녜웨이핑 외에도 대만 출신의 린하이펑(林海峰)이 있었다. 87년 홍콩에서 잉창치는 상금 1백만 달러를 건 세계대회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5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중국과 대만·한국·일본의 기사를 초청해 세계 프로 오픈 바둑대회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초청 기사는 모두 8명. 1년 후 열린 대회에서 실제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로 축소됐고 초청기사는 16명으로 늘었다. 그것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상금이었다. 대회는 4년마다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최초의 세계대회는 일본이 선수를 쳤다. 응씨배의 소식을 듣자 일본기원은 88년 4월 도쿄에서 제1회 후지쓰(富士通)배 세계대회를 먼저 열었다. 국적이 아니라 기원 소속을 기준으로 16명을 초청했다. 한국은 조훈현, 서봉수 9단 그리고 장두진 7단이 나갔지만 모두 1회전에서 탈락했다. 후지쓰배는 일본의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9단이 우승했다. 상금은 1500만 엔이었다.



 패배한 조치훈 눈물 떨구며 자책응씨배는 국적을 기준으로 초청 기사를 확정했다. 초청 받은 세계 16강은 중국 4명, 일본 5명. 한국 2명, 대만 3명, 호주 1명, 미국 1명이었다. 한국은 자존심이 상했다. 호주도 1명(중국에서 호주로 이민간 우쑹성(吳淞笙) 9단), 미국도 1명(일본기원 소속의 마이클 레드먼드 8단)인데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치훈을 제외하면 한국은 겨우 1명이었다. 대만은 린하이펑, 왕리청(王立誠), 왕밍완(王銘琬) 9단 등 3명. 한국은 항의했지만 주최 측은 말했다. 린하이펑이 대만인인 것처럼 조치훈은 한국인이기에 한국은 2명이다.



 

1 조훈현이 김포공항에서 종로 한국기원까지 우승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88년 8월 20일 응씨배 전야제가 중국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회장에서 열렸다. 인민대회장 자체만으로도 바둑은 세상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중국은 문호를 열어 관광객의 돈을 벌기에 혈안이었지만, 그건 그것이고 중국은 거만했다. 상석의 테이블엔 우칭위안(吳淸源)과 잉창치, 녜웨이핑이 앉았고 그다음 테이블에도 중국 기사들이 앉았다. 한국과 일본은 아래 테이블에 앉도록 배치되었다. 이미 국가로부터 기성(棋聖) 칭호를 받고 있었던 녜웨이핑에게 다들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시합은 응씨룰로 치렀다. 소위 ‘전만법(塡滿法)’이다. 덤은 8집. 당시 한국과 일본의 덤은 5집반. 평소 사용하던 덤이 아니면 불리한 것이 바둑. 일본은 항의 표시로 일본기원 총재가 예정된 중국행을 취소했다. 8월 21일에 1회전을, 23일에 2회전을 마쳤다. 조훈현은 2회전에서 고바야시에게 필패의 바둑을 역전승했다. 1과 5/6집을 이겼다. 이상한 숫자 같지만 한국식으로 계가하면 2집 승리였다. 조치훈은 녜웨이핑에게 지고 말았다. 조치훈은 눈물을 떨굴 정도로 자신을 책했다. “내 바둑은 끝났어. 내 바둑은 끝났어.” 새벽 3시에 조치훈은 일본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동안 조치훈은 녜웨이핑에게 2연승 했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이 오른 결승을 앞두고 한국기원이 항의했다. 왜 중국에서 다섯 판을 다 치르느냐. 잉창치는 물러섰다. 중국에서 세 판을, 싱가포르에서 두 판을 치르기로 했다. 당시엔 이미 한국의 국력도 상당히 높아졌기에 자존심은 당연했다. 장소 결정은 주최 측의 특권이긴 하지만 말이다.



열정적인 잉창치는 고향 떠난 지 40년 만에 자신의 고향 대륙에서 결승전을 치르고 싶어 했다. 1998년 여름 현대 그룹 회장 정주영이 소떼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의 고향 땅에 간 사례도 있잖은가. 누구라도 그리 하고 싶을 것이다. 진(秦)나라를 무너뜨린 항우도 고향으로 비단 옷 입고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잠시 잉창치를 보자. 그는 정계와 경제계에서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여섯 살에 바둑을 만진 그는 응씨룰이라는 바둑 규칙을 창안했다. 그 룰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만들고자 미국에 보급하는 등 바둑의 세계화에 인생 후반부의 의미를 걸었다. 대만 바둑계를 후원하고 잉창치 바둑교육기금회를 설립했다. 바둑 규칙에 관한 논문을 널리 모아 책도 펴냈다.



그가 창안한 바둑룰인 전만법은 독특하고 합리적이었다. ‘동형반복 금지’라는 대전제하에서 반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동형반복 금지의 대표적인 예는 ‘패’라는 현상이다. 하지만 완벽을 기한 나머지 다소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 한국과 일본의 규칙은 모호한 구석이 많은데 그래도 재미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기보 녜웨이핑의 백1은 덤 8집을 의식한 유연한 수법. 조훈현의 흑2 이하가 발 빠른 수법.



조훈현 결승 오르자 5분간 기립박수준결승은 11월 18~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린하이펑과 조훈현이 만났고 녜웨이핑과 후지사와가 붙었다. 후지사와가 조훈현에게 말했다. “자네와 내가 올라갈 텐데… 잘 두도록 하자.” 조훈현이 린하이펑을 2대0으로 누르고 해설장에 나타나자 700여 관중은 5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조훈현은 손으로 입을 막아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89년 4월 25일부터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결승 세 판이 열렸다. 이미 78년에 조훈현은 “중공의 성장이 빠르다. 녜웨이핑과 둬보고 싶다”고 승부욕을 비춘 적이 있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은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우연히 만나 비공식적으로 겨루어 본 적은 있었다. 당시 승부는 1승 1패였다. 결승 1국은 조훈현이 이겼지만 2국과 3국을 연달아 패했다. 4국과 5국은 싱가포르 웨스틴스템포드 호텔에서 열렸다. 5국을 보자. 기보는 중반의 기로. 덤이 8집이라 백을 잡은 녜 9단은 백1 이하 소극적인 행마를 했다. 덤이 8집이니 설마하니 쉽게 지겠느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승부는 그런 게 아니다. 큰 승부일수록 심리적인 압박을 얼마나 잘 털어내느냐, 그것에 승패가 달려 있다.



5국에서 조훈현은 전광석화와 같은 행마로 과감하게 실리를 취한 뒤 대마를 살려 승부를 끝냈다. 담대했다. 그렇다. 승부는 언제나 단 한 판으로 끝난다. 장기적으론 정치와 경제·문화와 같은 요인이 바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승부 외엔 다들 할 말이 없다. 93년 제2회 응씨배에서 서봉수 9단이 우승한 것도 승부사적인 기질의 승리였다. 상대였던 오타케(大竹) 9단은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결승국을 새가슴으로 두다가 결국엔 역전패를 당했다.



 

2 은관문화훈장을 받고 있는 조훈현. 맨 왼쪽 서 있는 인물은 조남철 9단.



89년 정부는 조훈현과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한국 바둑 절정의 순간이었다. 바둑은 국민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뿐만 아니라 응씨배 우승은 일본에 대한 강박도 단숨에 날려버렸다. 바둑은 개인의 승부 기질이 절대적으로 반영되는 게임. 문화적 강박도 개인은 극복할 수 있는 것. 일본 바둑도 별 거 아니구나. 중국 바둑도 별 거 아니구나.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한국 바둑계는 단숨에 한 단계 질적으로 도약을 했다.



응씨배 이후 한중일 경쟁의 불이 붙었다. 응씨배는 2012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 열렸고 1~4회와 6회는 한국이 우승했다. 우승자는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최철한. 5회는 중국의 창하오(常昊), 7회는 중국의 판팅위(范廷鈺)가 우승했다. 한국은 응씨배 우승을 통해 세계로 도약했다. 바둑계의 세계화를 이끈 응씨배는 곧 한국 바둑의 도약대이기도 했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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