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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산 토커이, 정말 신선…128년 됐지만 불멸의 맛 느껴”

중앙일보 2016.02.13 00:37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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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년 된 와인 가게 ‘베리 브러더스 앤드 러드’의 대표이자 베리 가문의 7대손인 사이먼 베리는 “변화가 중요하다”며 “이 곳을 보면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겠지만 정말 많이 변화해 왔다”고 말했다. [사진 베네딕트 그래디]


발을 들여놓는 순간 300여 년 전 시공간으로 순간 이동하는 느낌이 들 게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스트리트 3번지에 위치한 ‘베리 브러더스 앤드 러드(BBR)’다.

[세계 속으로] 318년 된 런던 와인상 ‘BBR’ 베리 대표


영국에서 가장 오랜 와인상 중 하나다. 1698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론 숙종 24년부터다. 제법 오래된 가게들은 ‘OOOO년 설립’을 내세우지만 여긴 ‘17세기 설립’이라고 쓴다.

 처음엔 커피·코코아·차·향료 위주였는데 점차 와인과 스피릿(증류주)으로 특화했다. 이제는 세계를 대상으로 영업한다.

하지만 발상지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다. 무수한 발길에 반질반질해진 바닥은 한쪽으로 기울었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소리를 냈다. 커피를 자루째 재던 저울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대표는 사이먼 베리로 7대손이다. 최근 가게의 구석방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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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가게 자체의 모습. [사진 베네딕트 그래디]

 - 300년간 와인상이다. 당신에게 와인이란 어떤 의미인가.

 “문명화된 삶의 일부분이다. 끊임없이 매료시키면서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다. 만일 와인을 홀로 마신다면 정말 중요한 걸 놓치는 셈이다.”

 - 300년을 지속·확장해 올 수 있었던 요체는.

 “우리 일을 잘 이해해서다. 발효된 포도 주스를 파는 게 아니라 경험을 판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변화도 중요했다. 이곳을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겠지만, 정말 많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 새 시장을 개척한 것도 그 일환이다. 와인이 아시아인 삶의 한 부분이 될 것이란 걸 알았다.”

 - 이제는 신세계 와인도 취급한다.

 “발효된 포도 주스란 본질은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와인이 다 다르기도 하다. 프랑스 보르도에만 1000개의 샤토가 있다. 프랑스 포도 품종도 수백 개다. 다양성이 와인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다만 신세계란 표현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가장 오랜 와이너리 중 한 곳인 클라인 콘스탄티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다. 나폴레옹이 좋아했다(1821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매년 1126L의 이 와인을 배달해 마셨다). 임종 때도 함께했다. 그런데도 남아공 와인을 신세계 와인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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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가게 자체의 모습. 오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진 베네딕트 그래디]

 - BBR이 낸 2014년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앙 프리뫼르(와인이 병입되거나 출하되기 수개월 전 오크통에 있는 상태에서 판매되는 시장) 리포트를 봤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어린 와인을 두고 5년, 10년 혹은 50년 후 정점에 어떠할지 이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를 두고 ‘음 20년 후엔 대단히 아름다워질 거야’라며 바로 미스 월드라고 판단하는 일이라고 누군가 비유했다. 결국 테이스팅이 중요하다. 대단히 경험이 많고 정밀 감별할 수 있는 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오랫동안 거래해 온 와인 메이커도 있겠다.

 “물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좋은 와인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그 후손도 그럴 것이란 걸 의미하지 않는다.”

 - 대표적 ‘단골’ 가문이라면.

 “빈티지 포트와인(오크통에서 오랜 숙성 기간을 거치는 포트와인과 달리 수확 후 2년 안에 병입, 숙성한다)을 만드는 시밍턴 가문이 있다. 월스나 콕번 코트 와이너리와도 오랜 관계를 맺고 있다. 포트와인은 놀라울 정도로 좋은데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정말 좋은 부르고뉴 와인을 사려면 수천 파운드, 수만 파운드지만 포트와인은 100~150파운드(17만~26만원)에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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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이상 숙성된 코냑. ‘베리 브러더스 앤드 러드’의 이름이 선명하다. [사진 베네딕트 그래디]

 - 와인에 입문하려 해도 생산연도·기후·마을·포도 등 공부할 게 많아 부담된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첫째로 기억할 건 ‘모든 걸 다 알 순 없다’는 것이다. 6개월마다 새 빈티지의 와인이 나오고, 매달 새 포도 품종이 발견되고, 새 발효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병마다 숙성 과정도 다르다. 다 알려 하지 말라. 수영한다고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다 가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병을 따는 법만 알면 된다. 물론 아는 만큼 즐기게 되는 측면이 있긴 하다.”

 - 조언한다면.

 “특정 포도밭의 와인을 택해 두루 마시며 공부할 수도, 특정 빈티지를 탐구할 수도 있다. 복잡함이 와인의 찬란함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 2015년 빈티지가 좋다던데.

 “특히 보르도가 좋았다. 5년 아니 10년 내 가장 좋을 수 있다. 사상 최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얘기하진 말자. 값이 올라갈 수 있다. 분명한 건 거의 완벽한 해여서 모든 수준의 와인이 다 좋을 것이란 점이다.”

 - 실패했던 해는 없었나.

 “최근엔 과학 덕분에 자연과 싸우는 능력이 나아졌다. 2013년이 그런 경우인데 1974년 빈티지와 유사한 조건이었다. 74년엔 완전히 망했다. 2013년엔 그럭저럭 와인을 만들 수는 있었다.”

 - 개인적으로 맛본 와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몇 해 전 마신 1835년 토커이 에센치아다.”

 - 일정 시점이 지나면 마실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나.

 “토커이는 불멸로 알려져 있다. 최근 마지막 남은 1888년산을 개봉했다.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128년 됐다’고 알아챌 사람은 없을 게다. 신선했다. 여타 와인들은 다를 수 있다. 1865년산 테이블 와인을 마신 적이 있는데 노쇠했고 연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 140세였다. 역사 속 인물을 마주한 듯했다.”

 - 당신에게 가장 값진 와인은.

 “정말 비싼 와인들이 있긴 하다. 공유란 차원에서 가장 값진 와인은 가장 소중한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2005년 결혼할 때 마신 66년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그중 하나다.”

[S BOX] 340년 된 모자점, 327년 양복점…오래된 가게 많은 런던

영국 런던에선 수백 년 된 가게가 드물지 않다. 오래된 번화가인 버킹엄궁 근처 세인트 제임스 스트리트에 몰려 있다. 1676년부터 영업한 모자 전문점 ‘록 앤드 코 해터스’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이 단골이었다.

와인상 ‘베리 브러더스 앤드 러드’(1698년 설립), 처칠 덕분에 세계적 명소가 된 아바나 시가를 파는 ‘제임스 폭스’(1787), 향수 가게인 ‘D R 해리스’(1790년)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데일리텔레그래프가 최근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들”이라고 보도한 곳이다.

텔레그래프 리스트의 가게들은 더 있는데 영국에서 가장 오랜 양복집으로 가발과 로브 전문인 ‘에이드 앤드 레븐스크로프트’는 1689년 설립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난감 가게인 ‘햄리’(1760년)와 세계적인 식자재 백화점인 ‘포트넘 앤드 메이슨’(1707년)도 있다.

우산과 지팡이를 파는 가게(제임스 스미스 앤드 선스)도 186년 됐다. 고급 맞춤 양복이란 뜻의 ‘세비로’란 말을 낳은, 새빌로에서 가장 오랜 양복점 ‘헨리 풀스 앤드 선스’(1806년)는 여전히 스리피스 슈트로 명성이 자자하다.

219년 된 서점인 ‘해처즈’는 지난해 200년간의 최고 소설을 선정했는데 앤서니 트롤롭의 1855년작 『관리인(The Warden)』이었다. 돈벌이만 한다고 비난받는 한 양로원 관리인의 얘기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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