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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가죽에 법률 기록하는 英1000년 전통 사라지나

중앙일보 2016.02.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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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양피지에 쓰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영국의 대헌장, 1225년 버전).

영국 상·하원이 다시 충돌했다. 이번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피지(皮脂·vellum)를 두고서다.
상원이 4월부터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피지에 법안을 기록해야 한다는 전통을 폐기하기로 하면서다. 대신 고품질 종이를 쓰기로 했다. 상원은 "디지털 시대 변화에 맞춰 피지 대신 좀 더 보관하기 쉽고 비용이 저렴한 종이를 도입하기로 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연간 8만 파운드(1억4000만원)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영국에선 상·하 양원에서 제정한 법률의 기록과 보관을 상원에서 총괄하고 있다. 상원은 어떤 매체에 기록하고 어떻게 보관할 지 결정권도 상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원은 그러나 크게 반발한다.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들이 모두 피지에 기록됐는데 그 전통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 출신으로 잉글랜드를 장악한 '정복왕 윌리엄'이 1086년 작성하게 한 토지대장(Domesday Book)이나 1215년 작성된 마그나카르타(대헌장) 등이 그 예다.

보수당 소속의 제임스 그레이 하원의원은 “이번 결정은 헌법과 문화에 대한 파괴 행위”라면서 “하원 차원에서 송아지 피지 사용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이번 결정을 막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종이의 보관 기간이 수백 년인데 비해 피지는 수천 년 보관할 수 있다는 내구성을 강조한다. 1870년부터 의회에 피지를 납품해온 회사 관계자는 “마그나카르타가 종이에 적혔다면 이미 오래 전에 먼지가 돼 없어졌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또 선출직인 하원은 650명으로 제한된 데 비해 비선출직인 상원이 800여 명 넘는 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연간 8만 파운드는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아낄 수 있는 비용"이란 것이다.

영국은 불문헌법의 나라다. 상·하원의 업무 영역은 그간 두 기관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규정돼 왔다. 지난해 말에도 하원에서 통과시킨 세금 관련 규정을 상원에서 부결시키면서 논란이 일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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