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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산은, 또 낙하산 회장이라니 …

중앙일보 2016.02.11 00:35 종합 2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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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KDB산업은행을 어떻게 보느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구조개혁의 상징으로 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어김없이 산은이 총대를 멨다. 1998년 외환위기 때 해체한 대우를 산은이 부둥켜안지 않았다면 우리 경제는 참으로 어려운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 후 구조개혁 사령부로서의 산은의 역할은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 예전처럼 관이 앞장서 민간 기업을 강제 구조조정하는 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구조개혁 하루가 급한데
시장은 개혁 포기로 인식

산은의 덩치는 웬만한 재벌 뺨친다. 자산이(연결기준) 약 300조원. 삼성의 351조원에 버금간다. 5% 이상 지분을 가진 곳이 377곳, 15% 이상의 사실상 자회사만 128곳에 이른다. 조선·자동차·항공·제철, 분야도 다양하다. 다 부실기업을 떠안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산은을 빼고는 구조개혁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지난주 새 산업은행 회장에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을 청와대에 추천하면서 “산은의 당면 과제인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할 적임자”라는 문구를 넣었을 것이다. 적어도 임종룡은 구조조정이 지금 산은의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하필 이동걸인가. 그는 금융위의 말마따나 “은행·증권 업무 경험이 풍부한 금융통”이다. 주로 은행 소매금융과 투자은행 분야를 맡아왔다. 금융가에선 사람 좋은 형님으로 통한다. 친화력 뛰어나고 금융 감각도 갖췄다는 평가가 많다. ‘훌륭한 금융인’이라면 토를 달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지휘할 적임자인지는 의문이다. 경제부총리가 총괄 지휘관이라면 관(官) 쪽 야전 사령관이 금융위원장이요, 민간 쪽 파트너가 산은 회장이다. 때론 말 안 듣는 은행의 팔도 꺾어야 하고 버티는 노조나 오너의 다리도 부러뜨려야 한다. 정책 금융과 구조조정의 노하우가 꼭 필요한 자리인 것이다.

백번 양보해 업무 능력은 두고 봐야 안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그가 ‘낙하산·보은 인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동걸은 2012년 대선 때 금융인 중 가장 먼저 박근혜 지지 선언을 한 대표적 ‘친박’ 인사다. 이 정부 들어 KB금융지주 회장 등 주요 금융권 자리마다 물망에 올랐다. “꼭 한자리 할 것”이란 얘기도 많았다.

이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신인 홍기택 전임 회장이 ‘낙하산 인사’로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5조원의 적자를 낸 대우조선해양의 부실 은폐 의혹이 불거졌을 때 최대주주이자 주채권 은행인 산은의 부실 관리에 대해 더 큰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 것도 그래서다. ‘낙하산 인사가 자초한 참사’ ‘사실상 불치병’이란 비아냥이 많았다. 그런 비난을 받고도 또 친박 인사를 앉혔으니 노조가 반발하고 금융권이 시큰둥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정권 초 대통령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를 척결하겠다”고 여러 번 강조했던 결과가 이건가.

모든 인사는 메시지다. 시장은 이동걸의 낙점을 구조조정의 중단으로 해석한다. 전임 최경환, 후임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입만 열면 구조개혁을 말해왔다. 구조적 수출·소비 부진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를 되살릴 길은 구조개혁밖에 없다고 되뇌었다. 대통령은 틈만 나면 국회 탓을 했다. 원샷법이 안 돼 구조조정을 못 한다고 다그쳤다. 과연 그런가. 사실은 이런 낙하산 인사 하나가 대통령과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고 경제에 더 큰 좌절을 주는 것이다.

하기야 낙하산 인사에 관한 한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인천공항공사·관광공사의 예에서 봤듯 별로 새삼스럽지도, 더 크게 좌절할 것도 없다. 20년 전 폴 크루그먼은 “미국인들은 정부가 문제를 방치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는 ‘기대 감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며 “(놔두면)현실 순응조차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온다”고 했다. 기대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자주 희망이 꺾이면 처음엔 아프지만 나중엔 무감각·무관심해진다. 무관심은 좌절·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럼에도 아직 대통령의 낙하산 인사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내가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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