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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나처럼 엉뚱하고 키우기 어려운 딸 있을까

중앙일보 2016.02.06 00:01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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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우리 딸도 한비야씨처럼 키우고 싶어요.” 어제 했던 특강 후 30대 학부모가 한 말이다. 이럴 때마다 뜨끔하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나 같은 딸, 두 명은 못 키운다고 하실 게 분명하다. 그렇다. 나는 키우기 어려운 딸이었다. 성격 밝고 심부름 잘하고 사람들하고 금방 친해지는 좋은 면도 있긴 하지만 엉뚱한 짓을 하는 게 늘 문제였다. 3녀1남 중 셋째인 나는 어릴 때부터 햇살 좋은 겨울이면 맨다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녔고, 꽁꽁 언 수돗가에서 시간만 나면 얼음을 깨고 놀다 손가락마다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을 꼬드겨 먼 곳까지 갔다가 길을 잃어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고, 커다란 드럼통 안에 숨어 술래를 기다리다 잠드는 바람에 아이가 없어졌다고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세계 일주 때 국제전화가 비싸
몇 달에 한 번씩 기본 통화만 해
엄마랑 약속한 일본 여행도 못 가
지금 딱 3분간 전화할 수 있다면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철이 좀 든 때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혼자 되어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는 엄마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연구하다 공부 잘하는 게 제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엄마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우리 셋째가 이번에 전교에서 몇 등 했다고 뻐길 수 있게 해드렸다. 그런데 정작 대학 입학 시험에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후기 대학은 원서도 넣지 않았다. “엄마, 나 대학 안 갈래.” 엄마 대답은 딱 한마디. “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다가 6년 만에 “엄마, 나 대학 갈래” 하니까 그때도 딱 한마디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온갖 허드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와 담쌓고 사는 내가 얼마나 걱정되고 속상했을까? 잔소리는 또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엄마는 두 번 다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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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이 아니다. 서른 살 되던 해, 엄마와 나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앞으로 엄마는 내게 선을 보라거나 결혼 얘기를 일절 하지 않기로, 대신 결혼할 사람은 내가 알아서 찾아오기로. 그 후 엄마는 한 번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걱정도 기도도 세게 하셨지만 시시때때로 엄마의 낯빛이나 눈빛에 나타나는 안타까움과 조바심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것도 모자라 서른세 살에 시집은커녕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가겠다는데도 엄마는 딱 한마디 하셨다. “너를 누가 말리겠니?” 나중에 물어보니 내가 어릴 때부터 꼭 세계일주 할 거라고 했기 때문에 ‘올 것이 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그 여행이 6년이나 걸리고 오지로 혼자서 다니는지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꿈에도 몰랐단다.

엄마가 걱정하는 줄 뻔히 알지만 여행 중에는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비싼 전화값 때문이었다. 내 여행경비는 하루 평균 10달러였는데, 국제전화는 최소한 20달러가 들었다. 그것도 오지에선 불가능하고 도시 우체국에서 줄을 길게 서서 기다렸다가 연결 상태 불량한 전화통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다. 기본 통화료 통화시간은 3분. 몇 달 만에 큰마음 먹고 한 전화를 엄마가 받으면 첫마디는 늘 “니 어디고?”, 그러고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게 안도의 눈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번번이 짜증을 냈다. “엄마아아아, 이 전화 얼마나 비싼 건데, 울려면 다른 사람 바꿔 줘요. 시간 없어, 빨리빨리….” 20달러면 2만원 남짓, 겨우 그 돈 아끼느라 엄마 눈에 눈물 나게 하고 그렇게 간을 졸이게 했던 거다.

세계여행이 끝날 때쯤 엄마한테 큰소리쳤다. 다 끝나면 엄마 가고 싶은 곳에 단 둘이 가자고. 엄마가 제일 가고 싶은 곳은 겨우(!) 일본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이 끝나고 나니 책 쓰랴, 방송하랴, 국토종단하랴 생각보다 훨씬 바빴다. 엄마와의 여행도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때마다 엄마는 “괜찮아. 당연히 바쁜 일부터 해야지”라고 하셨고, 나 역시 엄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데도 한두 달 늦어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국토종단을 끝내고 책을 쓰던 중 엄마가 돌아가셨다. 임종 직전에 엄마가 작은 소리로 비야야, 하고 날 다정하게 불렀다. 그러고는 몇 번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잠시 후에 평안히 떠나셨다. 마지막 가는 길,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항상 아슬아슬하게 사는 딸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었을 거다.

아,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이 휴대전화로 엄마랑 딱 3분만 통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있다면 20달러가 아니라 2000달러라도 할 텐데. 내 전화를 받으면 또 우시겠지. 그래도 난 신경질 안 내고 차분하게 말할 거다. 이 셋째 딸, 엉뚱한 짓은 해도 허튼짓은 안 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앞으로 펼쳐질 내 맹활약을 기대하라고,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뻐길 수 있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해드릴 테니 두고 보라고. 그리고 살아생전에는 쑥스러워 못 했던 말도 눈 딱 감고 할 거다.

엄마, 날 이렇게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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