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하경 칼럼] 사대주의 전에 사소주의가 있다

중앙일보 2016.02.03 00:29 종합 31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이하경 논설주간

1991년 11월 12일 오후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을 면담했다. 다음 날에는 신라호텔 1431호실에서 실세인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과 두 시간 동안 만났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북한 편에 서서 우리와 피 흘려 가며 싸웠던 적성국이었고, 미수교국이었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수께끼의 열쇠는 외교력에 있었다.

4차 북핵 실험 이후 드러난
미국과 중국의 민낯을 보았는가
군 출신 대통령들도 냉전과 싸워
노태우 북방정책이 입증했듯
힘 약해도 논리 당당하게 펼치면
강대국이 존중하고 역사에 기여

첸치천은 제3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참석차 서울에 왔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국 때문에 가능했다.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고립됐던 중국은 개혁·개방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APEC 가입을 절실히 원했다. 적대 관계인 대만을 제외하고 단독으로 가입하기를 원했지만 회원국들은 중국·대만·홍콩의 동시 가입을 지지했다. 난제를 떠맡은 차기 의장국 한국이 8개월간 셔틀외교를 펼쳐 3국을 모두 만족시키는 포맷을 만들어 동시 가입시켰다. 다자 외교의 경험이 전무한 한국의 성공사례였고, 한·중 수교의 초석이 됐다.

4차 북한 핵실험 이후 동맹국인 미국,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인 중국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약발이 듣는 제재는 물 건너가고 있다. 4년 뒤 북한이 100개 이상의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강대국을 원망하기 전에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동맹과 사대(事大)에 기댈 뿐 자기 논리를 당당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4반세기 전 북방정책의 웅장한 그림이 교차한다. 당시 중국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를 지배한 냉전 구조라는 주술(呪術)에서 벗어나 스스로 운명의 주인공이 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노태우는 집권 첫해인 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6개 항을 발표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우리는 소련·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다”고 천명했다. 미국은 넓은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는 동맹국 한국을 불신했을까. 정반대였다. 90년 6월 5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첫 한·소 정상회담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이었다. 미국이 북방정책을 신뢰했다는 의미다.

노태우 정부는 5년 임기 동안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중국과 수교했고, 헝가리를 필두로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 아랍권의 알제리, 아시아의 몽골·베트남까지 거의 모든 미수교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총리회담을 했고,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고, 최초의 통일 방안을 만들었다. 전 세계적 냉전 종식을 선도했던 것이다.

북방정책의 뿌리는 깊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 83년 6월 29일 이범석 외무부 장관은 6·23 선언 10주년 기념 특강에서 북방정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런데 73년 박정희 대통령은 1년 전의 7·4 남북 공동성명을 뒷받침하는 6·23 선언에서 “대한민국은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진한다”고 했다. 결국 냉전과 맞선 북방정책은 박정희의 의지가 전두환 시대를 거쳐 노태우 정부 때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배치됐던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운명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지금 우리는 미·중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중심을 잃고 자칫하면 한국·미국·일본 대 북한·중국·러시아의 신냉전 상황으로 내몰릴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미국·소련·중국을 상대로 탈냉전의 승부수를 던졌던 기개는 사라진 지 오래다. 몽골·싱가포르·핀란드는 우리처럼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는 작은 나라들이다. 한결같이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몽골은 중·소 균형외교를 하다 두 나라가 잠시 한눈을 팔던 90년대에 미국과 서방을 제3의 이웃으로 선택했다. 몽골이 미국·유럽연합(EU)·일본·한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자 불안해진 러시아는 2003년 채무의 98%를 면제해줬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사대만으로는 세상 일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 역사상 사대주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맹자』 양혜왕 하편 3장에서다. 먼저 사소(事小)가 언급된 다음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惟仁者 爲能以大事小(오직 인자한 자만이 큰 나라를 가지고 작은 나라를 섬긴다) 惟智者 爲能以小事大(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작은 나라를 가지고 큰 나라를 섬긴다). 약자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이치는 2300년 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힘이 약해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당당히 자기의 논리를 펼쳐야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사대주의 이전에 사소주의가 있었음을 잊지 말자.

이하경 논설주간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