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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만난 사람] 금 과녁 쐈던 그, 빅데이터 사냥 나섰다

중앙일보 2016.02.03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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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스타에서 빅데이터 전문가로 변신한 이은철 트레저데이터 코리아 대표. 그는 “빅데이터의 본질은 이를 활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현명한 경영 의사 결정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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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격 소구경 복사 결선. 한국의 이은철은 마지막 10발째를 쏘고서야 8㎏짜리 총을 내려놓았다. 다른 선수들은 한 발을 쏘고 무거운 총을 내려놓았지만 그는 사격감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다.

이은철 트레저데이터 한국 대표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격 금메달
은퇴 후 실리콘밸리서 인생 2막
IT기업 세일즈 맡아 실력 발휘
미국 빅데이터 기업서 스카웃
“한국 정보 인프라·인력 수준 높아
물길 트면 빅데이터 강국 될 것”

합계 점수 105.5. 그의 인생 최고 점수였다. 예선 8위로 결선에 턱걸이한 이은철이 대역전극을 펼치며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총을 놓지 않은 것은 처음으로 시도한 전략이었다”며 “경기가 끝난 뒤 팔을 보니 실핏줄이 터져 멍이 수십 개가 생겼더라”고 회고했다.

세계 최고의 ‘총잡이’였던 이은철(49)이 이번에는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과녁을 조준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빅데이터 기업인 ‘트레저데이터’의 한국 대표로 부임해 국내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에 나선 것이다.

그는 “사격은 수만 번의 경험을 분석해 자신만의 자세를 잡는 게 핵심”이라며 “무한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아내 의미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빅데이터와 유사한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사격을 접했다. 한 유원지에서 코르크총으로 인형을 맞히는 게임을 했는데, 쏘는 족족 인형이 떨어졌다. 친구들 몫까지 인형을 잔뜩 챙겨왔다. 이후 재능을 눈 여겨본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어린이 사격왕을 차지했고,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전미 사격 대회에서 1등을 했다. 1984년부터 17년간 태극마크를 단 그는 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에서 모두 정상을 차지하며 국내 유일의 사격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이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엔지니어, 세일즈 담당으로 일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더 이상 후배들의 기회를 뺏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떠났다”며 “IP인퓨전이란 회사에선 전체 매출 가운데 30%를 내가 올리기도 해 ‘내가 IT에도 재능이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미국 텍사스 루스톤공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IT 전문가다. 중학교 때에는 컴퓨터에 빠져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대학 졸업 후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입사 제의를 올림픽 출전 때문에 고사하기도 했다. 현재 대한사격연맹이 사용하는 경기용 실시간 데이터베이스 구축시스템도 그가 90년대 후반 만든 것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이 대표는 “한 때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을 꿈꿨다. 선수 시절에 한국통신(현 KT) 소속으로 활동했으니 계속 IT 분야에서 일 해온 셈”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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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후반엔 본인이 직접 IT회사를 세워 경영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아시아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트레저데이터로부터 한국 지사를 맡아달라는 스카웃 제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물인터넷(IoT)와 관련한 창업을 했지만 시장 여건상 시기적으로 너무 앞선 것 같다”라며 “이와 달리 빅데이터는 이제 인공지능·IoT 등에 장착되고 있는만큼 본격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은 IT 인프라가 잘 갖춰지고 엔지니어들의 수준이 높지만, 각종 비용·규제 같은 장벽 때문에 빅데이터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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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능력 있는 사격 선수는 많았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했던 80년대 한국의 사격 환경과 빅데이터 활용 환경이 유사하다”며 “사격처럼 물길만 터주면 한국이 빅데이터 강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가 스타트업·중소기업·대학교를 위한 빅데이터 솔루션을 한국에만 내놓은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가격은 월 500달러로 일반 기업용 서비스보다 훨씬 저렴하다. “비용부담으로 빅데이터 도입을 주저하던 국내 기업들이 손쉽게 데이터를 분석해 패턴을 발견하거나 예측·분석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빅데이터에 대한 환상이 관련 산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빅데이터의 본질은 이를 활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현명한 경영 의사 결정을 하도록 도와준다”며 “빅데이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일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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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후배 스포츠인을 위한 장학재단 출범”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꿈을 갖게 만든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강초현 선수다.

늘 밝은 표정을 짓는 강초현을 보고 그는 부잣집 외동딸인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그의 전담코치를 자청하며 물심양면으로 강초현을 지원했다.

이 대표는 “약간의 도움만 주기만 하면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는 후배 선수들이 많다”며 “어린 학생들이 돈 걱정없이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글=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이은철(49) 대표=고등학생이던 1984년부터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2000년까지 17년간 사격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올림픽 금메달 1개, 세계선수권 금메달 2개,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4개, 아시안게임 금메달 5개를 따내며 80~90년대 한국 사격계를 이끌었다. 2000년 은퇴해 미국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이후, 실리콘밸리테크·인텔라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실리콘밸리의 빅데이터 전문기업 ‘트레저데이터’의 한국 지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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