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수대] 이란에 갑질했다 당하는 한국

중앙일보 2016.02.01 00:21 종합 31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남정호 논설위원

연 금리 0.1%인 당좌계좌에 5000만원이 있고 1년 내 쓸 건 1000만원이라 치자. 나머지 4000만원을 이자율 높은 다른 예금으로 돌리지 않을 이는 없다.

한데 은행이 당좌계좌만 쓰도록 강요한다면 어쩔 건가. 당장 달려가 난리 칠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었다. 수년 전 곤경에 빠진 이란을 상대로.

서방 측 요구로 2010년 우리도 이란 제재에 동참해야 했다. 핵심 제재 중 하나가 달러 거래 금지였다. 석유 도입 중단과 함께 이란 수출업체 2500개가 치명상을 입을 판이었다. 고심 끝에 나온 묘안이 원화 결제 시스템이었다. 원화를 주고 석유를 들여오되 이란이 받은 대금을 국내 은행 계좌에 쌓아뒀다 한국 상품을 사 갈 때 쓰게 하자는 거였다.

처음엔 잘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기업은행에 설치한 계좌에 예상보다 많은 4조~5조원이 쌓이면서 문제가 생겼다. 연 금리가 0.1%에 불과해 이란 측이 일부를 정기예금으로 돌려달라고 수없이 요구했던 거다. “3%짜리 정기예금에 들어도 연 1000억원을 훨씬 넘는데 정당한 이자를 못 받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철저히 무시됐다. 분개한 이란 측은 중앙은행 부총재까지 한국에 보내 은행을 바꾸려 했지만 이마저 좌절됐다.

이런 상황이 보도될 때까지 두 은행은 별 부담 없이 4조~5조원을 굴렸다. 폭리 논란이 커지자 2012년 8월 뒤늦게 이자를 올리긴 했다. 한데 연 1.6%였다. 1년 만기 정기예금이 3%를 넘던 때였다.

당시 이란에 정통한 인사들은 발을 굴렀다. “곧 제재가 풀릴 텐데 그렇게 홀대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란 걱정이었다.

이들의 예상대로 이란 제재는 3년 뒤 해제됐다. 이제는 이란이 맡겼던 수조원을 빼 갈 태세여서 은행들 애가 탄다. 돈을 묶어두기 위해 협상단을 보낸다 법석이지만 제대로 대접했다면 분위기가 훨씬 좋았을 거다. 이자 갈등이 격화됐을 때 실무자로 방한했다 온갖 수모를 겪었던 이가 이젠 칼자루를 쥔 메디 구다지 중앙은행 해외담당 부총재다.

은행들은 이란에 갑질해 최소한 수백억원이 넘는 이득을 챙겼고 당국은 이를 방조했다. 국익이란 가면을 쓴 불의(不義)다. 당시 은행 고위층들은 단물을 빨았겠지만 결국 그 부담은 후임자와 나라가 고스란히 지게 됐다. 당장의 이익에 눈멀어 국격 실추는 물론 장기적 국익에 해를 입혔다면 이제라도 지탄받아 마땅하다.

남정호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