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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찍었는데 이름 몰라” 묻지마 투표가 부른 ‘강남 3구의 역설’

중앙선데이 2016.01.31 01:36 464호 3면 지면보기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강남 3구 6개 지역구에서 단 한 석을 건졌다. 강남은 전형적인 야도(野都)였다. 강남을 합동유세장에서 신정치개혁당 이신범 후보, 민주당 홍사덕 후보, 민주자유당의 김만제 후보(왼쪽부터)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쯤 되면 강남 3구의 역설이다. 선거에 이기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누가 나가도 당선이 확실하다는 새누리당의 텃밭 강남 3구 이야기다.


새누리당에 몰표 줄수록 거물 사라지고, 정치 위상은 추락

새누리당에 이 지역은 확고부동한 집토끼다. 어차피 이길 곳에 강한 후보를 투입할 필요가 없으니 싹쓸이 드라마가 이어질수록 큰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역설을 낳게 됐다. 유권자 입장에선 새누리당을 찍어줄수록 새누리당이 유권자들을 외면하는 역설이다. 신(新) 정치 1번지로 불리며 거물들이 일합을 겨뤘던 과거는 과거로만 남았다. 2013년 강남·서초·송파 등 3구에서 거둬들인 지방세는 3조9006억원으로 서울 전체 25개 구 합계(13조8700억원)의 28.1%, 2011년 기준 강남 3구 땅값의 총액(365조원)은 대한민국 전체 땅값(3535조원)의 10%였다. 이에 비해 강남의 정치적 위상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다.





#1 공무원 강모(57)씨는 1980년대 후반 대치동으로 이사 온 뒤로는 한 번도 강남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을 물었더니 “찍었긴 찍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검색 한 뒤에야 의원의 이름을 댔다. 서울 청담동 주민 김모(55·여)씨는 지역구 의원의 이름을 최근에야 알았다고 했다. “얼마 전 집에 배달된 ‘의정활동 보고서’를 보고서야 ‘맞아, 이 사람이었지’라고 알게 됐다”는 것이다. IT 업체 회사원 김모(36·서울 압구정동)씨는 “언제부터인가 정치 신인들만 출마하고, 너무 자주 바뀌다 보니 큰 정치인이 크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강남에서 40년을 살아온 자영업자 나모(47)씨는 “강남 유권자들 상당수는 ‘내가 국회의원 후보자들보다 훨씬 더 잘났다’고 생각한다. 요즘 무게감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누가 있느냐. 그냥 1번이면 무조건 찍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현장에서 들어본 강남 유권자들의 목소리에선 정치적 무기력증이 묻어났다.



언제부터인가 강남 지역에선 정치적 무게감이 느껴지는 ‘거물’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게 현장의 불만이었다. 이중재·황병태·이태섭·김동길·홍사덕·최병렬·오세훈(강남), 김덕룡·박찬종(서초), 이회창·맹형규·홍준표(송파) 등은 강남이 키운 여야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이에 비해 현재 강남 3구의 7개 지역구 의원 중 재선은 새누리당의 유일호(송파을) 의원과 김을동(송파병) 의원뿐이다. 그나마 김 의원은 18대에선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나머지는 모두 초선 의원들이다. 검사(김회선·서초갑), 교수(강석훈·서초을), 외교관(심윤조·김종훈, 강남갑·을), 의사(박인숙·송파갑) 출신 신인들이 새누리당 텃밭에서 공천을 받고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들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 지도부에 의해 선발돼 전략공천을 받았다.



정치 신인들인 만큼 지난 4년간 국회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고, 김회선 의원의 경우 스스로가 “서초갑처럼 중요한 지역구에는 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와야 한다”고 고백하며 일찌감치 불출마 의사를 밝히는 이례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스타 정치인의 산실이었던 강남 3구 정치의 ‘경량화’나 ‘거물 정치인 실종’ 현상은 이 지역에서의 새누리당 독주와 무관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민컨설팅의 박성민 대표는 “새누리당 후보로 나오면 거의 당선 되니 새누리당은 전문직 출신 정치 신인을 강남에 내보내는, 일종의 ‘비례대표’식 공천을 강남에서 하기 시작했다. 권력자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넣는 방식으로 공천을 주다 보니 3선 이상 거물이 나오기 힘든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과연 강남 3구의 새누리당 쏠림현상은 어느 정도일까. 각종 통계를 보더라도 이곳에서 새누리당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서울에서 302만4572표(48.18%)를 얻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322만7639표·51.42%)에게 뒤졌다. 그러나 강남 3구 득표율에선 60.14% 대 39.46%(강남), 58.60% 대 41.01%(서초), 52.09% 대 47.53%(송파)로 박 후보가 크게 앞섰다.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선 강남구(35.4%)와 서초구(36.2%)만이 개표에 필요한 투표율 33.3%를 넘기며 ‘오세훈 시장 구하기’에 나섰다. 2008년 18대 총선 강남갑 선거에선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의 이종구 후보가 통합민주당의 김성욱 후보에 비해 3.5배가 넘는 몰표(6만1047표 대 1만7251표)를 받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최근 선거가 거듭될수록 짙어졌고, 급기야 19대 총선에선 강남·서초·송파의 7개 지역구를 새누리당이 싹쓸이하게 된다.

강남갑의 통일국민당 김동길 후보, 민주당 이중재 후보, 민자당 황병태 후보(오른쪽부터). [중앙포토]



홍사덕 “유권자 똑똑해 나 뽑아줬다” #2 황병태 vs 이중재 vs 김동길. 1992년 14대 총선 당시 강남갑의 대진표다.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의 후보는 지역구 현역 의원인 황병태였다. 김영삼(YS) 총재의 신임이 두터워 ‘우 병태, 좌 병태’란 우스갯소리까지 낳았던 인물이다.



야당인 민주당의 카드는 당시 이미 5선 경력의 이중재 후보였다. 둘의 싸움으로 시작한 레이스는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김동길 후보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결국 “이게 뭡니까~”란 유행어로 바람을 일으킨 김동길 후보(5만4568표)가 황병태 후보(3만5907표)와 이중재 후보(2만7876표)를 눌렀다.



강남을도 명승부였다. 민주당의 홍사덕 후보가 민자당의 김만제 후보를 꺾는 이변을 낳았다. 김 후보는 경제부총리와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회장을 지낸 중량감 있는 정치 신인이었다. 홍 전 의원은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선거가 끝난 뒤 ‘강남이니까 나를 뽑아줬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녔다. 강남 유권자의 80% 이상은 국회의원 후보자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에 신중하고 현명한 투표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당시 강남 3구의 선거구 6개 중 5개를 야당이 주워담았다. 그만큼 강남은 확실한 야도(野都)였다.



이런 경향은 강남 개발이 성숙기에 접어들던 85년 12대 총선부터 두드러졌다. 당시 정치 규제가 풀린 야당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출전하면서다. 특히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뛰어들면서 선거판이 뜨거웠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내부에선 ‘신당(신민당) 바람을 제3한강교(한남대교)에서 저지하라’는 게 특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민정당은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박사 출신으로 정무장관을 지낸 이태섭 후보를 강남에 내세웠지만 결국 실패했다. 한 지역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선거에서 김형래(신민당)·이중재(민주한국당) 등 두 야당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88년 13대 총선에서도 강남 3구의 6개 지역구 중 여당인 민정당은 단 한 석만을 얻는 데 그쳤다. 그랬던 강남 지역이 확실한 새누리당 텃밭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96년 15대 총선부터다.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이 강남 3구 7개 선거구에서 5석을 수확한 것을 계기로 새누리당 계열의 강세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판세가 굳어졌다. DJ에 대한 불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진보정권 10년을 거치며 폭발하면서 보수 일색의 투표 성향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야당도 포기하지 말고 인물 발굴해야” 20대 총선 공천전으로 새누리당이 달궈지고 있다. 김무성 대표가 “전략공천은 없다”고 선언한 만큼 강남 지역에도 인위적인 새 피 수혈은 없을 가능성이 크고, 19대 현역 의원들이 도전자들을 상대로 힘겨운 방어전에 나섰다. ‘새누리당 공천=당선’이란 의식이 여전한 만큼 본선보다 경선으로 치러질 예선이 더 뜨거울 전망이다. 강남갑에선 이종구 전 의원 등이 심윤조 의원에게, 강남을에선 권문용 전 강남구청장과 원희목 전 의원 등이 김종훈 의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회선 의원의 불출마로 주인이 사라진 서초갑에선 이혜훈 전 의원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맞붙었다. 서초을에선 현역인 강석훈 의원에 맞서 박성중 전 서초구청장과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정옥임 전 의원 등이 예비후보자로 등록했다. 강남에서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큰 강남병 지역도 류지영 의원과 이은재 전 의원 등 전·현직 여성 비례대표 출신들이 출사표를 냈다. 현역 의원들의 존재감이 크지 않은 만큼 뚜렷한 강자가 없는 혼전이 지역구마다 벌어질 공산이 크다.



새누리당 내에선 김태호 최고위원의 분구 지역 출마를 권하는 목소리까지 나왔지만 당내에선 “이미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경남지사 출신의 김 최고위원을 내려 꽂자는 주장은 새누리당이 강남 지역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또 내심 3선을 노렸던 유일호 의원이 결국 경제부총리로 자리를 옮기며 출마를 포기한 것처럼 이 지역에서의 3선 도전을 금기시하는 새누리당의 불문율이 큰 정치인의 등장을 막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와 관련, 정치연구소 ‘더모아’의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강남 유권자의 특정 정당 몰아주기식 투표는 결국 ‘강남 홀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강남이 정치 1번지로 다시 태어나려면 유권자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각 정당이 유권자들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그 결과 주민이 혜택을 받게 된다”며 “당장 야당 국회의원이 나오긴 힘들겠지만 그나마 여야 간에 박빙의 승부가 펼쳐져야 새누리당도 강남에 신경을 쓸 것”이라고 했다. 박성민 대표는 “19대 송파을에서 민주통합당 천정배 후보가 새누리당 유일호 후보에게 3000표 차이로 아깝게 패한 걸 보면 강남에서도 여전히 인물론은 통한다. 매번 진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야당도 좋은 인물을 발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철재·추인영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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