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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폭락으로 10조원 날리고도 “시장이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있다”

중앙선데이 2016.01.31 01:33 464호 4면 지면보기

1 킹덤센터에서 본 리야드 시 전경. 사진 왼쪽 하단 부분에 터번을 쓴 아랍 남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킹덤센터 상층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 리야드 야경.



지난 20일 오후 5시 리야드 킹덤센터 66층에 있는 알왈리드 킹덤홀딩스 회장 사무실. 알왈리드의 비서실장인 무자디디는 친절하게 방문객을 맞았다. 무자디디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부장관으로 세계 유가를 주물렀던 야마니 밑에서 석유부 차관을 지낸 거물이다. 그는 “서울 인근에 있는 스몰 디즈니랜드(에버랜드)를 간 적이 있다”며 한국의 날씨 등을 물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는 약간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알왈리드는 전날 피곤한 일정을 보냈다. 그는 사우디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0분간 면담을 했다. 여느 때처럼 알왈리드는 밤새 전 세계 주식시장을 모니터하다 뉴욕·상하이 등 세계 증시의 동반 폭락을 확인하고 오전 5시에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투자의 귀재인 알왈리드도 이달 들어 재산가치가 85억 달러(약 10조2000억원)나 줄었다. 한 차례 지분을 늘린 트위터의 주가는 공모가 밑으로 추락했다. 알왈리드뿐 아니라 워런 버핏,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등 전 세계 빅리치들도 최근 엄청난 재산을 날렸다. 하지만 알왈리드는 “시장은 오를 때도 있고 내릴 때도 있다”며 담담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투자의 귀재다운 담대한 태도다. 사실 알왈리드는 위기 때 오히려 기회를 노렸다. 투자 대상 기업이 가장 어려울 때 들어가 ‘대박’을 친 경우가 많았다.

3 알왈리드 왕자의 시작과 미래. 1980년 컨테이너 박스에서 시작된 그의 꿈은 2004년 리야드 최고 빌딩인 킹덤센터를 거쳐 2018년 완공될 홍해를 내려다보는 세계 최고의 21세기 바벨탑 킹덤타워로 확장됐다. 리야드·제다=김춘식 기자


킹덤시티 개발 주도, 투자 귀재 알왈리드 회장

씨티 투자로 세계적인 ‘큰손’ 부상대표적 사례가 씨티은행에 대한 투자다. 알왈리드는 1991년 씨티은행에 5억9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씨티은행은 중남미 국가에 빌려준 대출과 부동산 사업에 막대한 손실이 나면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사우디 재무장관을 지낸 아버지도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있다”며 아들을 말렸다. 하지만 알왈리드는 치밀한 연구 끝에 씨티은행의 주가가 자산가치에 비해 저평가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1년 전 사들인 지분까지 합치면 총 투자액은 7억9700만 달러로 씨티은행 지분의 15%에 달했다. 이 대담한 베팅은 알왈리드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겼고, 그를 세계적인 투자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알왈리드는 97년 애플의 지분 5%를 사들였다. 당시 애플은 퇴출 위기에 몰려 있었다. 85년 다른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애플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복귀했지만 매출은 부진했고 혁신적인 신제품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알왈리드는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로 픽사를 키운 잡스의 가능성을 눈여겨봤다. 결국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18달러에 사들인 주식은 2년 만에 100달러에 육박했다.



알왈리드는 97년 말 현대차와 대우차에 각각 1억 달러와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대우차는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3분의 1 토막이 났지만 현대차에선 상당한 이익을 거뒀다. 역시 외환위기로 한국 기업들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는 기회를 노렸다.



프랑스의 경기 침체와 반미 정서로 파리의 유로디즈니월드가 최악일 때 그는 지분을 사들였다. 디즈니는 도쿄 디즈니의 성공에 힘입어 92년 파리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외곽에 디즈니월드를 개장했다. 프랭크 게리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7개의 호텔을 지어 프랑스인은 물론 파리를 찾는 유럽 관광객을 노렸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와인을 곁들여 두 시간 동안 점심을 먹는 프랑스인들에게 패스트푸드점 같은 디즈니 레스토랑의 컨베이어 시스템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알왈리드는 유로터널이 개통되면 영국 관광객들이 몰려들 것이라며 유로디즈니월드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94년 3억4500만 달러에 유로디즈니월드의 지분 24%를 사들였다. 디즈니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은행 이자 납부를 유예하고 디즈니 본사에 내는 로열티를 깎는 협상력을 발휘했다.



알왈리드의 투자 영역은 다양하다. 지역적으로 중동은 물론 미국·중국·유럽·아프리카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다. 펩시콜라 같은 전통 기업부터 이베이·트위터·프라이스라인닷컴 등 정보기술(IT) 기반 기업에도 투자한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기업인 중 한 명이다. 거대 미디어그룹 타임워너와 뉴스코프에 투자했으며 사우디 최대 미디어그룹 로타나를 소유하고 있다. 로타나 그룹은 23개의 TV 채널, 영화사까지 갖춘 아랍 최대의 미디어 기업이다. 투자 관계를 맺고 있는 루퍼트 머독의 21세기 폭스사가 로타나 지분 19%를 갖고 있다.



알왈리드는 ‘호텔왕’으로 불릴 만하다. 럭셔리 호텔 체인인 포시즌, 페어몬트와 독일 뫼벤픽 리조트그룹의 대주주다. 그의 사무실엔 상징적인 사진이 걸려 있다. 무슬림들이 신성시하는 메카의 카바신전 앞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알베이트 타워(120층)를 중심으로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는 사진이다. 각 빌딩엔 메카 순례객들을 위한 호텔들이 있는데 알왈리드가 투자한 포시즌·페어몬트·래플스·뫼벤픽·사보이의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다.



중국 징둥닷컴 주식도 매입그는 중국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베이징·상하이·항저우·홍콩·마카오 등에 25개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거나 지분 투자를 했다. 그가 대주주인 씨티은행은 중국에 55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씨티는 청나라 때인 1902년 상하이에 외국 은행으론 최초로 지점을 열었다. 2013년엔 중국 2위의 온라인 쇼핑기업인 징둥닷컴(JD.com) 주식을 사들였다. 현재 알왈리드의 징둥닷컴 지분 가치는 10억 달러가 넘는다. 류창둥 징둥닷컴 대표는 알왈리드의 투자에 대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관계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알왈리드의 투자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모토로라·월드콤·프라이스라인닷컴·트위터 등에 대한 투자에선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 기업과 함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업종도 그의 투자 포트폴리오 명단에 꾸준히 올리고 있다.



세계 부호들의 순위를 매기는 경제 매거진 포브스는 지난해 알왈리드를 34위에 올렸다. 평가 재산은 226억 달러였다. 재미있는 점은 포브스가 그를 자수성가형 부자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포브스는 재산 규모와 함께 ‘자수성가지수(Self made score)’를 발표한다. 1에서 10까지 점수를 주는데 1은 요즘 말로 ‘금수저’쯤 되고 10은 ‘흙수저’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알왈리드는 9점으로 흙수저 출신 부자로 평가됐다. 아버지가 치과 의사인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8점)나 쿠바 이민자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8점)보다 부모 덕을 덜 봤다는 얘기다. 알왈리드의 할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이다. 외할아버지는 리아드 엘 솔 레바논 초대 총리다. 출생 배경만 보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성장 과정은 불우했다. 그는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레바논에서 자랐다. 고교 시절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모욕한 교사의 배를 주먹으로 때려 퇴학당하기도 했다.



“신께 감사하면 신은 더 주신다”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의 5대 재벌로 성장한 킹덤홀딩스를 80년 창업했을 때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금은 고작 3만 달러(3600만원)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 컨테이너 사무실을 마련했다. 사업 초창기엔 자금이 모자라 아내의 목걸이를 팔아야 했고 씨티은행에서 100만 리얄(3억2100만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알왈리드의 투자 방식은 석유에 의존하는 다른 사우디 기업인들과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월스트리트 스타일에 가깝다. 그가 ‘아라비아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투자에 실패한 것은 실수(mistake)가 아니라 실책(blunder)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책을 하지 않으려면 투자를 결정하기 앞서 철저한 사전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그의 투자 신조다. 최규선 썬코어 회장은 95년부터 알왈리드와 친분을 유지해 오고 있다. 외환위기때 알왈리드의 한국 투자를 주선하기도 했던 최 회장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알왈리드는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부자일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료를 보고 사람들을 만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그의 통찰력에 깜짝 놀랐다. 당시 그의 예측은 2년 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현실화됐다.”



사우디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보수적인 사우디에서 미래 지향적이고 개혁적인 발전 모델을 창조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우디 최대의 학교 재단인 킹덤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사우디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투자한 것이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갖춘 킹덤스쿨에는 40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킹덤스쿨은 영어와 과학·기술 교육을 강조한다. 알왈리드는 사우디 공립학교 교과과정에서 이 분야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봤다. 그는 앞으로 사우디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관광·금융·제조업을 키워야 하는데 젊은이들에게 영어와 기술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본다.



알왈리드는 8년 연속 ‘걸프비즈니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랍인 1위로 뽑혔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포브스지에서 2년 연속 세계 1위 부호에 올랐던 레바논 이민자 출신인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 아메리카모빌 회장은 4위에 그쳤다. 알왈리드가 사우디는 물론 중동에서 존경 받는 이유는 아낌없이 선행을 베풀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엔 전 재산인 320억 달러를 생전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 엄청난 돈을 빈민 구제와 교육, 아랍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왕성한 자선활동(Philanthropy)을 증명해주는 감사패와 상장이 전시돼 있다. 무슬림의 5대 삶의 지침 중 하나인 자카(Zakat·자선)를 누구보다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신께 감사하면 신은 더 주신다.” 알왈리드는 파리의 조지 5세 호텔 로비에 이런 쿠란 문구가 새겨진 석판을 설치했다. 그에게 자선은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루 5시간만 자며 열심히 돈을 벌려는 삶의 목적이다.



 



 



리야드=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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