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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화백이 그린 자주색 아트 라벨 보는 순간 ‘이건 무통이구나’ 감탄했죠”

중앙선데이 2016.01.31 01:21 464호 8면 지면보기

1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1973 빈티지 라벨. 2 마르크 샤갈이 그린 1970 빈티지 라벨. 3 20세기 표현주의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1990 빈티지 라벨.



로칠드 가문이 소유한 ‘샤토 무통 로칠드’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특급 5대 와이너리 중 하나다. 이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당대 최고 화가들에게 의뢰해 만들어 붙이는 아트 라벨 때문이다. 가문의 4대손인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 유명한 그래피스트인 장 카를뤼에게 의뢰한 그림을 1924년 빈티지 라벨로 처음 사용한 게 시작이다. 하지만 보르도 지역 다른 와이너리 주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됐고, 45년 종전을 기념해 젊은 화가 필립 줄리앙에게 라벨에 승리의 V자를 그리게 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이후 살바도르 달리, 후안 미로, 샤갈, 앤디 워홀, 피카소, 제프 쿤스 같은 저명 화가들이 매년 이름을 올렸다. 그 덕분에 빈티지별로 와인 경매 시장에서 와인 1병에 수백, 수천만원의 가격으로 거래되며 각국 와인 컬렉터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한국 온 ‘샤토 무통 로칠드’ 오너 로칠드 남작

지금까지 출시된 샤토 무통 로칠드의 아트 라벨 빈티지는 총 70개. 지난해 12월 출시된 70번째 ‘2013 빈티지’ 라벨을 그린 작가는 바로 한국의 이우환 화백이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고 동양인으로도 다섯 번째(일본 2명, 중국 2명)다.



로칠드 가문의 후손이자 샤토 무통 로칠드의 공동 소유주인(46) 남작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화백의 라벨이 들어간 2013 빈티지를 한국에 직접 소개하기 위해서다. 라벨 원화 공개 행사가 열렸던 28일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그를 따로 만났다.



-이 화백을 라벨 화가로 선정한 배경이 궁금하다.“2014년 베르사유궁을 장식한 이 화백의 전시를 보고 샤토 무통의 정서와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림에선 주변의 모든 것들과 화합하는 힘이 넘쳤다. 게다가 그는 와인을 좋아했고(웃음) 기꺼이 우리의 부탁을 승낙했다.”



-라벨을 위한 그림 주제를 따로 부탁하나.“주제는 없다.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 의지에 맡긴다. 단 화가의 그림이 샤토 무통 로칠드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와인과 포도나무,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 그리고 우리 가문의 문장인 무통(양)을 주제로 한 그림을 보내온다.”이번에 공개된 그림은 흰색 바탕에 한 호흡으로 단번에 그려낸 듯한 자주색 붓질이 인상적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며 점차 붉어지는 자주색의 흐름은 마치 오크통 안에서 잘 숙성되고 있는 와인의 빛깔처럼 보인다. 이 화백은 “회색과 푸른색을 주로 써 온 나로서는 처음으로 사용해본 색”이라며 “자주색 물감을 쓴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을 섞어 수차례 시험한 끝에 만들어낸 특별한 자주색”이라고 설명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이미지는 와인을 마실 때의 붕 뜨는 기분을 표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4 이우환 화백이 그린 2013 빈티지 라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짙어지는 자주색은 시간이 지나면서 숙성돼 가는 와인 빛깔을 연상시킨다.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샤토 무통 로칠드]



-이 화백의 라벨 원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보는 순간 ‘이건 무통이구나!’ 감탄했다. 주위에서도 ‘이제까지의 무통 로칠드 아트 라벨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라고 했다. 이 화백이 와인색을 직접 만들어내 우리만의 유니크한 작품을 만들어줬다는 데 다시 한번 감사한다.”(이 화백은 “원래 오렌지색이 마음에 든다고 가져갔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색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다시 그린 것을 써달라고 우겨서 가까스로 승낙을 받아냈다”며 웃었다.)



-라벨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는.“처음 시작한 분은 나의 외할아버지 필립 남작이다. 당시 화가 친구들인 장 위고, 레오노르 피니, 장 콕토 등에게 라벨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고 그 대가로 와인을 선물했다. 친구들 간의 우정으로 이뤄진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전통이 됐다. ‘예술을 위한 와인, 와인을 위한 예술’로 이뤄지는 우리 가문과 화가들의 우정 같은 거다. 자신이 그린 라벨의 와인과 그 전에 그려진 다른 작가의 와인을 상당한 양(구체적인 숫자는 ?비밀?이라고 했다)으로 선물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명예로운 거래’라고 부른다. 아직까지 이 거래를 거절한 작가는 없다.”



-아트 레이블이 가격에 영향을 미치나.“대답은 노 앤드 예스(No & Yes)다. 와인 가격은 화가의 유명세가 아니라 그해 빈티지 품질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결정된다(이번 와인은 750mL 한 병당 80만원대다). 하지만 일단 시장에 나오면 컬렉터들에 의해 또 다른 가격 시장이 이루어진다.”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은 1920년대에 ‘와인의 샤토 병입’을 처음 시작하며 와인 업계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에는 와인이 생산되면 샤토에선 오크통째로 중간상인들에게 판매했고, 와인의 숙성과 병입은 중간상인들이 담당했다. 필립 남작은 “내 와인은 내 병에 나의 라벨을 붙여 나의 샤토를 떠나야 한다”며 “생산자가 와인의 품질을 끝까지 보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르도 특급 와인 등급 체계에서 2등급이었던 샤토 무통 로칠드를 73년 1등급으로 올려놓은 이도 필립 남작이다. 그는 이때 이를 기념할 만한 73년 빈티지의 그림 작가는 피카소여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피카소의 그림을 받아냈다. 당대 최고의 화가와 1등급으로 승격된 와인의 조합은 커다란 화제가 됐다. 공교롭게도 피카소는 73년 세상을 떠났고 필립 남작은 1973 빈티지 라벨에 ‘피카소를 추모한다(en hommage a Picasso·1881~1973)’는 글귀를 적었다.



현재 샤토 무통 로칠드는 줄리앙 드 보마르셰와 그의 형, 누나가 공동 소유하고 있다. 대학에서 고대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고미술품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품 중개회사에서 일하다 2009년 본격적으로 가업에 참여했다. 2014년 어머니가 타계한 후부터 아트 라벨을 위한 화가 선정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줄리앙 드 보마르셰 드 로칠드



-공동 소유주로서 3남매의 역할은.“실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소유주로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각자의 역할을 한다. 형은 경영을 감독하는 고문, 누나는 대외 홍보, 그리고 나는 작가 선정의 책임을 맡고 있다.”



-작가는 어떻게 선정하나.“책임이 큰 만큼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 와인의 맛이 매년 달라지는 것처럼 작가들도 매년 달라져야 하고 또 최고의 작가를 선정해야 하니까. 개별적으로 찾기도 하지만 화가의 친구, 또는 유명 미술관·화랑 등에서 추천을 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당대 최고의 작가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우환 화백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혼자서 처음으로 선정한 작가다.”



-회화뿐 아니라 다른 아트 장르까지 확대할 생각도 있나.“패션 디자인, 건축가,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을 생각이다.”아트 라벨 작가 중에는 화가가 아닌 이들도 있다. 조각가 헨리 무어(1964)와 세자르(1967), 영화감독 존 휴스턴(1982), 영국의 찰스 왕세자(2004), 설치 미술가 주세페 페노네(2005) 등이다. 예술가의 작품으로 라벨을 만들지 않은 해도 있다. 샤토 무통 로칠드 100주년과 150주년 기념 라벨엔 샤토를 처음 시작한 너새니얼 남작의 초상화와 사진을, 77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후가 샤토를 방문한 것을 기념한 라벨을, 2000년에는 21세기의 시작을 기념해 아우크스부르크의 양을 새겼다.



-한국은 첫 방문이다.“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시아, 특히 한국 문화에 애정이 많았기 때문에 나 또한 이번 방문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아쉽게도 일정이 짧아 이번엔 리움 미술관만 둘러봤다. 도자기·회화·조각 모두 정말 훌륭했다. 특히 ?한지?라는 종이에 그린 그림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백남준을 비롯한 현대미술도 시선을 끌었다.”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한국의 ‘단색화’가 주목받고 있다.“현대미술에 대한 공부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아트 라벨 화가 선정을 위해 계속해서 ‘발견’하는 단계다.”



-와인이든 미술이든 중국 시장의 성장이 예사롭지 않은데.“큰 시장이지만 우리는 중국 시장에 올인한 적이 없다. 시장은 언제나 요동친다. 균형감을 잃으면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시장은 전 세계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철학은 무엇인가.“73년도에 1등급으로 승격됐을 때 외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다. ‘이제 일등이 되었고 예전에는 2등이었으나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이다. 나를 비롯해 새로운 세대가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 나가겠지만 여전히 무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품질이든 가치든.”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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