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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감행 미룬 히틀러 소련군 대응시간 줘 패배

중앙선데이 2016.01.31 01:06 464호 24면 지면보기

1943년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구 소련 병사들이 나치 독일 기갑부대의 진격에 맞서기 위해 구축한 기관총 진지를 지키고 있다. 그 해 7월 12일 쿠르스크 주변 마을인 프로호로프카에서는 독일군 전차 200여 대와 소련군 전차 600여 대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대규모 전차전을 벌였다. [게티이미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전략이다. 전쟁사는 전략·전술의 역사다. 경제적 영토인 시장을 놓고 벌이는 현대 기업들의 쟁탈전은 흡사 전쟁을 방불케한다. 무기·전쟁사 전문가인 나현철 논설위원이 2차 대전사를 통해 기업에 적용할만한 교훈을 찾아본다.


[2차대전사로 보는 기업 경영] 쿠르스크 전투

<편집자 주>



 



1943년 7월 12일 중부 러시아의 한적한 마을 프로호로프카 주변이 수백 대의 강철 괴물로 뒤덮였다. 독일군 전차 200여 대와 소련군 전차 600여 대가 쿠르스크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전차전을 치른 것이다. 날이 저물자 불과 3㎢에 불과한 이 일대 지역에 파괴되고 불탄 전차 수백 대가 나뒹굴었다. 전투 결과를 숫자로만 보면 독일군의 승리였다. 독일군 전차 40여대가 격파되거나 버려진 데 비해 소련군의 손실은 300~500대에 달했다. 훈련 수준과 사기가 높은 독일군이 티거(Tiger)와 같은 신형 전차까지 투입한 덕이다. 하지만 이 전투가 독일군의 한계였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있는 물자와 병력이 독일군에는 없었다. 이후 전황은 소련이 끝없는 물량으로 독일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독일군의 동부전선 마지막 공세프로호로프카 전차전이 치러진 쿠르스크 전투(1943년 7월 5일~15일)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시도한 마지막 대 공세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1940년 프랑스를 6주만에 무너뜨리면서 사실상 온 유럽을 수중에 넣었다.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갑부대를 집중 투입하는 전격전(Blitzkrieg)은 독일군이 무적이라는 신화를 퍼트렸다. 유일하게 남은 건 섬나라 영국뿐이었다. 히틀러는 상륙작전으로 영국마저 점령하려고 했지만 영국 항공전(Battle of Britain)의 패배로 제공권 확보에 실패하면서 소련이 있는 동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1941년 6월 22일 300만 명이 넘는 독일과 핀란드·루마니아군이 소련 영토로 밀려들어갔다. 12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름을 딴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의 시작이었다. 서부전선에서처럼, 독일군은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을 가차없이 밀어붙인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순식간에 돌파해 그 해 겨울 러시아의 2대 도시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코앞에 이르렀다. 첫 6개월에만 500만명이 넘는 소련군이 죽고 다치고 포로가 됐다. 그 해 겨울 밀어닥친 기록적인 한파와 주코프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잠시 멈췄던 독일군은 1942년 다시 남부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해 유전이 밀집한 코카서스 지방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주축군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운명의 저울추가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 만든 무기와 미국의 원조, 애국심으로 재무장한 소련군은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붙잡고 늘어졌다. 다음해 2월 이곳에서 포위된 독일군은 20만명 이상이 전사하고 10만명에 가까운 나머지 병력은 소련에 항복해 포로가 됐다. 5월엔 튀니지에서 싸우던 독일과 이탈리아군 23만명이 항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공격 주저하다 방어망만 강화시켜히틀러에겐 분위기를 바꿀 ‘한방’이 절실했다. 특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는 ‘북극곰’ 러시아의 콧대를 확실히 눌러야 했다. 마침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전선이 한 군데 있었다. 북쪽의 오렐과 남쪽의 벨고로드 사이에서 독일진영으로 튀어나온 이른바 ‘쿠르스크 돌출부’였다. 남북 250㎞, 동서 160㎞에 이르는 이 돌출부엔 소련군 병력의 26%, 기갑전력의 46%가 집중돼 있었다. 이를 차단해 없앤다면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침공작전을 고안한 전략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 원수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만슈타인 사이엔 공격 시점을 두고 중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만슈타인은 독일군의 전력이 충실해지는 것보다 빠른 공격이 중요하다고 봤다. 인구나 산업생산력이 우월한 소련의 방어력 강화 속도가 독일의 공격력 강화 속도를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히틀러는 충분한 준비를 중시했다. 소련의 T-34전차를 압도할 수 있는 성능을 갖췄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양산이 늦어지고 있는 강력한 티거와 판터(Panther) 전차, 그리고 페르디난트(Ferdinand) 자주포 등을 대량으로 투입하길 바랬다. 압도적인 질(質)적 우세를 확보하면 물량의 열세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히틀러의 주장대로 ‘성채작전(Operation Citadel)’으로 명명된 쿠르스크 공격작전은 5월에서 6월, 다시 7월로 연기됐다. 공격을 뻔히 예상했던 소련군에게 작전 지연이 큰 선물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일군이 전력을 증강하고 훈련하는 동안 쿠르스크 전 지역엔 지뢰밭과 대전차 장애물, 대전차포가 섞인 최장 175㎞의 종심 방어망이 겹겹으로 들어섰다.



 신형전차 배치 기다리다 때 놓쳐7월 5일 드디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80만 명에 가까운 독일군이 전차 2500대와 포 7500문, 항공기 2500대의 지원을 받아 돌출부의 남북에서 진군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은 전차 3600대, 포 2만 문, 항공기 2800대로 무장한 130만 명 규모였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소련 육군은 물론 공군도 더 이상 물러터진 군대가 아니었다. 쿠르스크 북쪽의 독일군은 겨우 10㎞ 가량을 전진한 뒤 막대한 손실만 입고 5일 만에 공격을 중단했다.



남쪽의 상황은 이보다 좋았다. 정예 무장친위대(SS) 기갑사단들이 소련군의 방어선에 구멍을 내고 30㎞ 가량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돌출부의 한가운데인 쿠르스크에 도달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독일군은 할 수 없이 쿠르스크로 통하는 작은 기차역인 프로호로프카를 공격한다. 그리고 그 전투는 전술적으로 독일군의 승리였지만 전략적으론 패배였다. 동부전선 기갑전력의 70%를 쏟아 붓고도 쿠르스크 돌출부를 절단하지 못한 독일군은 7월 13일 히틀러의 작전 취소 명령에 따라 그 동안 확보한 지역을 내주고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온다.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것도 소련군에겐 천행이었다. 이후 사기와 전력이 약화된 독일군에게 소련군의 반격이 몰아쳤다. 그 해 8월까지 소련군은 중부 러시아의 요충인 오렐과 브리얀스크, 벨고로드와 하르코프를 탈환해 우크라이나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때늦은 전투였다. 소련군의 허점을 노려 주력을 일소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만슈타인의 지적대로 그해 4월, 늦어도 5월엔 작전이 시작됐어야 했다. 하지만 신형 전차에 대한 히틀러의 애착으로 공격 시기가 연기되는 동안 소련군의 방어력은 독일군의 공격력 이상으로 강해졌다. 반면 히틀러가 기대한 신무기는 생각만큼 많이 생산되지도, 전장에서 활약하지도 못했다. 판터 전차는 적군에게 격파된 수보다 트랜스미션 등에서의 기술적 결함으로 버려진 숫자가 훨씬 많았다. 둔하고 무거웠던 페르디난트 자주포는 거의 대부분 독일군 스스로 파괴하고 후퇴해야 했다. 이런 신무기들이 독일군의 전력 강화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때늦은 타이밍을 보상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는 게 전쟁사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작전 지연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이라는 전략적 위협을 신경써야 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서 발목이 잡혀 있던 4~5월엔 없었던 리스크가 독일군이 공격을 미루는 동안 새로 생겨난 것이다.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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