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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지혜의 감수성 갖고 실천할 정치지도자 누구인가

중앙선데이 2016.01.31 00:24 464호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날마다 전해오는 것은 야당이 조각나고 있다는 뉴스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국민회의 등 계속하여 등장하는 새로운 당들과 유명 정치인들의 당적 이동은 일일이 추적하기도 어렵다. 여당의 경우도 정책이나 인물의 교체가 가닥 잡기가 쉽지 않다. 여론 조사의 결과가 자주 보도되지만 등락이 심해서 총선에서 어떤 당이 얼마 정도의 의석을 확보하게 될지 예상할 수가 없다. 또 보도되는 바로는 대통령 선거가 닥쳐도 누가 강력한 후보가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할 법안들이 그대로 방치되거나 파기되어 정책의 방향이나 국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빠른 삶 느린 생각] 이념적 정열과 현실적 이성

원인은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고, 또 정당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낼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열정을 불러 일으킬만한 이슈가 없다는 데 정치적 불확실성의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을 따르게 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강력한 지도자가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집단적 위기가 카리스마를 만들고 강력한 지도자를 등장하게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큰 이슈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수소탄 실험처럼 큰 이슈가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인명·시설물·재산은 물론 사회 구조의 근본을 철저하게 파괴한 대재난으로 6·25 전쟁보다 큰 사변은 없을 것이다. 북핵은 다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대하여 비슷한 재난을 재연할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사안이다. 다만 그 가능성을 느낀다고 하여도 그 위협이 너무 크고 현실적 대응책이 불분명한 까닭에, 그리고 우리로서는 국내외의 위협적인 정세들에 너무 익숙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큰 정치적 이슈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시각을 국내에 한정한다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일반 국민이나 노동계층에서 볼 때, 실업·노동조건·소득격차·사회보장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고, 기업의 관점에서도 경제성장률의 저하, 침체상태에 들어간 듯한 중국 경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정세의 불안정성은 우리의 기업에도 새로운 대응을 요구한다. 그리고 조금 더 큰 관점에서, 그간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설 정도의 단계에 들어섰다면, 지금까지의 경제적·정치적 발전을 공고히 하여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 이상의 구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지금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인 사회 이상의 구현이 우리의 과제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한 번의 커다란 정치적 운동으로 한 번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적인 상황이 개선되고 참으로 전향적인 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한 번의 국민 총력의 동원으로 또는 정책의 강행으로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영국의 저술가가 쓴 것을 보면 (풍자작가가 쓴 것이기는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또는 냉전 이후 영국의 정치 상황을 말하면서, 그것이 침체 상태에 들어간 것은 관심과 에너지를 동원할 수 있는 국제적인 이슈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한다. 나치즘·파시즘·대독유화·스페인내란·공산주의·반공주의. 그 다음 조금 작은 문제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1958년과 76년의 런던 인종 난동, 미국 흑인 민권운동 등이 정치적 관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물론 종전 이후 전후 복구나 민생문제가 있었지만,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작은 현실 문제 해결에 휘말려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하여서는, 이념의 공식으로는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정치인들, 특히 노동당 정치인들에게, 사회복지 문제는 큰 이슈였지만, 그것은 사실상 정당에 관계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과제였다. 그 중요성과 해결에 동의하면서, 정당 소속을 바꾸는 것, 또는 사명(使命)과 이권을 적절하게 거래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이러한 영국의 정치 정세에 대한 분석을 거론하는 것은, 어느 쪽으로나 깊이 있는 분석이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분석이 오늘의 우리 상황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역사적 전개에는 들고나는 고비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때, 정치는 큰 혁명적 격동을 거친다. 그러나 혁명이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여러 현실 문제들을 간단히 해결해주지는 아니한다. (어떤 인류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개체적 존재이면서 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주기적으로 축제나 집단행동을 통하여 한편으로 집단의 일체성을 확인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체성을 재구성하여야할 필요를 느낀다고 한다. 정치적 격동은 그러한 의미도 갖는다.) 혁명은 쌓여 있는 현실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트지만, 정작 문제의 해결은 혁명적 정열을 넘어가는 합리적 문제 해결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점진적이면서 지구(持久)하는 노력을 통해서 안정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공산 혁명, 전체주의 또는 전제(專制)통치가 인간문제를 전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듯이, 그것과 역방향으로 가는 혁명도 쉽게 새로운 해결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해체, 민주화, 또는 소위 ‘아랍의 봄’이라고 하던 중동과 아프리카의 민주화 혁명 등은, 적어도 현 시점까지는, 새로운 공존과 평화의 세계를 가져오지 못했다.



혁명만으로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 못해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혁명적 격동을 거친 다음에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합리적 개혁이다. 그것을 위하여서는 사회 속에 그에 합당한 지적인 능력이 문화자본으로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아랍의 봄이나 벨벳혁명 이후 중동과 동구 지역이 보여주는 차이는 예비된 문화 자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적절한 경제적·사회적 기준의 삶을 위하여서는 일정한 수준의 지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기술과 과학이다. 또 필요한 것은 사회의 도덕적 자본이다. 개인으로서나 사회 성원으로서나 일시적인 이익을 초월하는 헌신이 없이는 어떠한 일에서나 충실한 직무 수행을 기대할 수 없고, 더구나 보다 큰 사회적 목적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가능할 수 없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도덕 문화는 단순히 도덕적 규범의 준수를 보장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더하여, 필요한 것은, 부분적인 일들에 집중하더라도 그것의 인간적 영향을 큰 테두리 안에서 고려하는 일이다. 이것은 지적 수련이 수반된 도덕적 감성과 판단 능력을 요구한다. 모든 개인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그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서 나오는 판단을 받아들일 감수성이 존재하여야 한다. 사람이 하는 많은 일은 부분적으로 정당하여도 전체적으로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을 예견하는 데에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 고려란 단순히 이해득실의 총체적 계산이 아니라, 개체로나 전체로나, 인간 존재에 대한 경외감에 기초한 것이라야 한다. 그것이 지속하는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것은 극히 막연한 느낌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작은 도덕적 감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지적이고 지혜로운 상황 의식으로 확대된다. 꼭 맞아 들어가는 사례는 아니지만, 최근 해외의 뉴스에 있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여기에 들어 본다.



스티븐 호킹 교수는 얼마 전 영국 BBC의 한 공개강좌에서 한 청중의 질문에 답하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미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핵전쟁,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바이러스 등이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것이라는 설명은 자명하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발전의 누적 효과도 인간을 ‘치명적인 최종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호킹은 자신이 낙관주의자라고 하면서, 결국 인간이 다른 별들로 옮겨감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계산으로는, 100년 정도 지나면, 준비가 시작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1000년 이상의 시간 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말 가운데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과학 기술에 대하여 적절한 정보를 가져야 하고 과학자들이 과학정보의 전달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발과 발전 효과 평가할 새로운 인간학 필요그런데 민주시민이 공유하여야 하는 또는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과학 기술의 정보만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지식의 각 분야에 있어서의 정보의 개발과 그에 기초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속도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그러한 개발과 발전의 누적 효과를 참다운 인간적 가치 척도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데에는 새로운 인간학이 필요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학문이 인문학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인문학은 시대가 요구하는 엄청난 과제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경제에 기여하는 분과과학이 되라는 압력 하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에 반드시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문화에 스며있는 인간적 가치를 잊지 않은 양식이다. 그것의 단순한 표현은 도덕과 지혜의 감수성이다.



격동의 시기 이후 정치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비슷한 지혜의 감수성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구체적 정책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의지가 추가되어야 한다. 물론 이에 더하여 그것이 촉매가 되어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수성이 정치적 실천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또 그것이 정치적대정열의 시대를 계승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 전체의 사고와 심정의 관습의 전환이 있기 전에는 그것은 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한 전환의 준비를 생각하는 지도자 그리고 정치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적인 상황은 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를 낳는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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