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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대학도 충칭으로… 뤄자룬이 ‘작전’ 지휘

중앙선데이 2016.01.31 00:24 464호 29면 지면보기

1 전시수도 충칭 시절의 국립 중앙대학 임시교사. 체육 시간도 난징 시절과 별 차이 없었다.



역대 중국의 각계 지도자들 중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목수를 했으면 세계적인 명품을 제작하고도 남을 황제가 있었는가 하면, 가수나 상인·시인으로 대성했을 황제도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개성이 독특했다. 남들이 뭐라 하건 괴상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황제이다 보니,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일들을 하루에도 몇 건씩 저질렀지만 영명했다는 황제들과 한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그 어떤 혼란기라도 청소년 교육 하나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일전쟁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3-

1932년 새해 벽두, 일본군이 상하이(上海)를 공격했다. 수도 난징(南京)에 있던 국립중앙대학 교수들은 위기를 느꼈다. 정부에 질의서 비슷한 것을 보냈다. 결론은 간단했다. “안전한 교육 장소를 물색해 주기 바란다.” 국민정부는 당대 최고학부의 우려를 “서생들의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우선 전쟁시절에 적합한 총장감부터 물색했다.



 

중앙대학 총장시절의 뤄자룬.



그 해 8월, 칭화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했던 뤄자룬(羅家倫·나가륜)은 중앙대학 총장 임명장을 받고 밤잠을 설쳤다. 날이 밝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왜적에게 동북을 유린당한 지 1년이 지났다. 일본과 한차례 전쟁은 피할 방법이 없다. 태평양이 불바다가 되는 꿈을 꾸었다.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장담 못한다.”



교수들은 뤄자룬에게 불만이 많았다. 조급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35년 일본군이 화북(華北) 지역을 점령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툭하면 여러 날 자리를 비웠다. 어디를 갔다 왔는지 말하는 법도 없었다. 해가 바뀌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들여 나무 상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상자 수천 개가 교정에 꽉 들어찼다. 크기들이 엄청났다.



회의 참석차 충칭(重慶)에 갈 일이 있었다. 뤄자룬은 일정이 끝나도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어디를 다니는지, 부산하게 돌아다니기만 했다. 동행한 사람이 “정말 산만한 사람”이라고 불평했다는 말을 듣고도 행동을 바꾸지 않았다. “대학 총장 감이 아니다. 명당자리 고르러 다니는 풍수(風水)선생이 더 어울린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꿈쩍도 안 했다. 충칭을 떠나기 직전, 이번에도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충칭은 산과 강의 보호를 받는 곳이다. 자연 풍경도 아름답다. 전시 교육 장소로 비견될 곳이 없다.”



 

2 일본 공군의 공습이 있던 날이면, 밤마다 중앙대학 여학생이 횃불을 들고 시민들을 격려했다. [사진 김명호]



37년 7월, 뤄자룬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보낸 초청장을 받았다. “루산(廬山)에서 항일에 관한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다. 참석해 주기 바란다.” 루산에 오른 뤄자룬은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동남 연해지역의 몇 개 주요 대학과 과학 연구 기관을 충칭과 인근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이 좋겠다.” 장제스는 즉석에서 동의했다. “네 덕에 내가 사람 제대로 봤다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뤄자룬은 그제서야 장제스가 자신을 직접 중앙대학 총장에 임명했다는 것을 알았다.



2개월 후, 장제스는 교육부를 통해 쓰촨(四川)성 주석 류샹(劉湘·유상)과 충칭대학 총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국립 중앙대학이 충칭 이전을 진행 중이다. 지역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도움을 기대한다.” 며칠 후, 뤄자룬도 류샹과 충칭대학에 협조요청 전문을 발송했다. “잠시 임시 교사를 지을 땅만 빌려주면 된다.” 류샹도 열렬히 환영한다는 답전을 보냈다.



학교 부지가 해결되자 운반이 문제로 등장했다. 학생과 교직원들이 난징에서 충칭까지 가려면 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형 선박을 통째로 빌려도 부족할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뤄자룬은 전교생과 교직원들에게 호소했다. “각자 재주껏 충칭까지 와라.” 다들 끄덕였다.



뤄자룬은 사람 문제가 해결되자 도서와 교육용 자재 운반에 머리를 싸맸다. 선박회사인 민생공사(民生公司) 사장 루쭤푸(盧作孚·노작부)에게 하소연했다. “교육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학생들이 뜯어보고 조립할 항공기 3대와 해부용 시신 24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칭으로 옮겨야 한다. 농학원에 있는 모든 가축도 암수 한 마리씩 옮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봐라. 후방에 번식시켜야 한다. 교내에 있는 개와 닭들도 놓고 갈수 없다. 침략자들 먹으라고 오리 한 마리, 닭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겠다.” 듣기를 마친 루쭤푸는 “노아의 방주가 따로 없다”며 배꼽을 잡았다. 선박 1층을 가축용으로 개조했다.



9월 23일, 교육부는 중앙대학의 충칭 이전을 인가했다. 10월부터 운반이 시작됐다. 1개월 후, 중앙대학은 평소와 다름없이 충칭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가축들이 도착하는 날 진풍경이 벌어졌다. 전교 학생이 교문에 몰려나와 교가를 부르며 환영했다. 만년에 뤄자룬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았다.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난징의 옛 친구들을 객지에서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충칭의 중앙대학은 전시 중국의 최고학부였다. 48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이 세계 우수대학 순위를 발표했다. 중앙대학이 도쿄대학을 누르고 아주(亞洲) 1위를 차지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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