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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브랜드 백남준 다시 세우기

중앙선데이 2016.01.31 00:21 464호 29면 지면보기

백남준의 ‘로봇 조각’ 시리즈 중 대표작인 ‘존 케이지’, 1990. [사진 갤러리 현대]



백남준(1932~2006)이 간 지 벌써 10년이 됐다. 그는 2006년 1월 29일(한국 시간 1월 30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아리랑’과 ‘엄마’를 흥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예술가로서는 한창 나이라 할 일흔 네 살이었다. 십대 후반에 조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떠돌며 지구적 예술가(Global Artist)로 살았던 그는 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지닌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였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라는 소개 뒤에 따라붙던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별명은 그에겐 훈장이자 별점이었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뚝심으로 ‘백남준표 예술’을 밀고 나간 그는 아시아 또는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이미 수십 년 전에 낙관했다.


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백남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광대 하나가 한판 잘 놀다 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969년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나갈 작품의 설계도를 ‘비빔밥의 미학’으로 은유한 말로 설명했다. “레오나르도(다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화려하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락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백남준의 야심과 희망은 웬만큼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콜라주(뜯어붙이기) 기법이 유화(물감)를 대체한 것처럼, (TV)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TV는 의자가 되고 젖 가리개도 되고, 십자가도, 부처도 됐다. 백남준에게 TV는 탐구해야 할 우리 시대의 중요 개념이었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매체였으며 퍼포먼스의 대상이었다.



고인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서울 삼청로 갤러리 현대에서 추모전 ‘백남준, 서울에서’(4월 3일까지)가 개최되고, 27~28일 국제 심포지엄 ‘백남준 비디오 조각 보존과 뉴미디어 아트의 미래’가 열렸다. 사후 10년이 흘렀는데도 그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미약하고 작품 값은 저렴하다. 이런 미래를 예견하듯 그는 1988년 발표한 에세이에서 ‘부자 예술의 지배에 대항하는 가난한 예술’인 비디오 아트의 공공성을 말했다. “비디오는 유일한 작품의 독점에 바탕을 둔 체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예술세계에서 힘들게 버텨내고 있다. 현금을 내고 사가는 작품, 순전히 과시하고 경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예술세계에서 말이다.”



백남준이 창조한 것은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작품이 아니라 ‘인지의 도구’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즐기고 깨닫는 방편으로서의 예술이었다. 그는 『벽암록』에 나오는 이음새의 자리가 없는 알탑인 ‘무봉탑’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 아래 모든 사람이 타고 가는 배’, 바로 자신의 예술 목적지라고 말했다. 백남준 연구자들이 그를 일러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동시에 엔지니어인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라 정의하는 까닭이다. 백남준의 정신을 오늘 그의 탄생지에서 발신해 전 세계로 뿌리는 것은 남은 자의 할 일이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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