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거진M] 내 마음에 별로 남을 '응답하라 1988' 명장면

중앙일보 2016.01.31 00:01
이젠 더 이상 가슴 설레며 금·토요일 저녁 시간을 기다릴 이유가 없어졌다.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 이하 ‘응팔’)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보석같이 빛나는 명장면을 남겨놓았다. magazine M 기자들이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장면을 소개한다. 사진=tvN


낯선 서울에서 택이 외롭지 않던 이유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쌍문동 골목 5인방의 어린 시절. 이사 온 택이가 장난감 말을 타다 팔을 다쳐 깁스를 하자, 등굣길에 친구들이 신발 주머니와 가방을 대신 들어준다. 딱지를 주며 위로하는 녀석도 있고, 덕선은 택이를 업어주기까지 한다.

이래서 꽂혔다
엄마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온 택이. 내성적인 성격 탓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굳어 있는 그를 쌍문동 골목 아이들은 두 손 벌려 환영한다. 그들에겐 택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같은 골목에 살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친구 될 자격이 충분했다. 학원에나 가야 동네 애들을 만날 수 있고, 아빠 직업과 아파트 평수를 따져가며 친구를 골라 사귀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아련하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다. 돌이켜 보면, 1970년대 말 지방에서 서울 변두리 동네로 이사 온 어린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딴 세상에 온 듯, 모든 게 낯선 내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던 골목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 건 순전히 ‘응팔’ 덕분이다. 뭐가 그리 바쁜지, 먼저 저 세상에 가버린 ‘딱부리’ 녀석이 특히 보고 싶다.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씩씩한 미란씨의 조금 늦은 결혼식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가난했던 미란(라미란)과 성균(김성균)은 결혼식도 치르지 못하고 살을 맞대며 살았다. 갱년기를 맞은 미란이 우울해 하자, 무뚝뚝한 아들 정환(류준열)은 부모님이 간소하게나마 멋진 옷을 차려입고 결혼 행진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래서 꽂혔다
‘쌍문동 치타 사모님’ 미란은 생활력 강하면서도 저보다 못한 이웃들에게 퍼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존심 상하지 않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주는 게 매력 포인트다. 아들이 아프고, 남편이 약해질 때도 미란은 씩씩하다. 그녀 앞에 서면 심각한 일도 별일 아닌 게 되고, 우울한 일도 웃을 거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미란이 성균과 작게나마 식을 올릴 때, 눈물을 질질 흘렸다. 평생 퍼주기만 했고, 늘 씩씩한 척했지만, 미란도 그래보고 싶었을 것이다. 드레스를 입고 흩날리는 꽃가루를 맞으며 웨딩 케이크를 자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제가 늘 살뜰히 돌보았던 아들과 이웃들 덕에 소박하게나마 소원을 이룬다. ‘응팔’을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라미란이고, 라미란이며, 라미란이다.
글=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김정봉,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미옥(이민지)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봉(안재홍)은 꽃단장을 하고 병실을 찾아간다. 하루 종일 병실 앞을 서성대던 그는 간호사를 통해 미옥에게 편지 봉투 하나를 전한다. 그 속에는 보드 게임 ‘부루마블’에서 플레이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행운의 카드, ‘우주여행 초청장’이 들어 있다.

이래서 꽂혔다
초반부만 해도, 정봉은 유머를 전담하는 캐릭터였다. 푸근한 몸매와 촌스러운 트레이닝복 등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장르가 코미디로 바뀌곤 했다. 그랬던 그가 우연히 미옥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면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먹방의 제왕이 순도 120%의 로맨티스트로 다시 태어난 것. 사랑하는 여자가 무엇을 원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그는 “미옥이가 지금 원하는 건 바깥 세상”이란 덕선(혜리)의 말에 힌트를 얻어, 다리를 다친 미옥이 상상에서나마 어디든 갈 수 있는 선물을 건넨다. 그 두툼한 손가락으로 카드를 조심조심 봉투에 담았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배경 음악으로 흐르던 이상은의 2집 타이틀곡 ‘사랑할거야’는 특급 보너스.
글=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고시원에서 확인한 성자매의 우애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고시원에 들어간 보라(류혜영). 엄마의 걱정에 덕선은 “멀쩡한 자기 방 있겠다, 뭐가 걱정이야~ 나나 걱정해!”라고 받아친다. 하지만 막상 언니의 성냥갑만 한 고시원 방에 들어선 덕선은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이래서 꽂혔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보라·덕선 자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둘의 밥상 난투극은 많은 자매들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언니와 남동생에 치여 생일상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서러움에 덕선이 목 놓아 울던 모습은 전국의 많은 둘째딸을 울렸다. 서울대생에 독한 성격까지 갖춘 언니가 미워 죽을 것 같은 그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마음엔 언니를 향한 깊은 애정이 있었을 터다. 이 장면은 자매의 복잡한 감정을 현실적이고 아름답게 포착한다. 덕선은 언니의 힘든 고시 생활을 단박에 알아차리고선, 보라를 끌어안고 엉엉 운다. 보라는 그런 덕선을 보며 내심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비죽 튀어나온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언니, 내 동생. 티격태격하면서도 인생의 힘든 순간마다 곁에 있어준 언니와 함께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글=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선우가 아저씨에게 건넨 ‘진짜’ 청첩장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보라와의 결혼식 전날 밤, 선우(고경표)는 작은 봉투 하나를 들고 봉황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새아버지 무성(최무성)에게 ‘진짜’ 청첩장을 건넨다.

이래서 꽂혔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선우. 고등학생 땐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이 엄마 곁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2회에서 엄마가 자신 몰래 목욕탕에서 일한다는 걸 알게 된 날, 보라에게 “나도 모르는 걸 왜 아저씨가 알아요? 아들도 모르는 걸 택이(박보검) 아빠가 아시냐고요”라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낸다. 그랬던 선우가 변했다. 아니 성장했다. 마음을 조금씩 열어보이다가, 마침내 무성을 아버지로 받아들였다. ‘이게 진짜’라며 건넨 청첩장엔 ‘최무성’이란 이름이 아버지 자리에 손글씨로 적혀 있다. 자신의 결혼식에서 꼭 엄마 옆에 앉아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선우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기에 이 장면은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비록 호칭은 끝까지 아저씨였지만, 훌쩍 지나온 시간만큼 성숙해진 선우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글=이지영 기자 tueapril@joongang.co.kr


정환의 고백, 넌 장난이라 해도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정환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피앙세 반지를 덕선에게 내밀며 담담하게 고백한다.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보고 싶고, 만나면 그냥 좋았어. 옛날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나 너 진짜 좋아. 사랑해.”

이래서 꽂혔다
역시 사람의 취향은 변하지 않는 걸까. ‘응답하라 1994’(2013, tvN)에서 순정남 칠봉이(유연석)가 ‘첫사랑 DC’로 나정(고아라)에게 자신의 집을 전세로 내주며 호구로 전락했을 때,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남편 찾기에 동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난 어쩌자고 또! 이 소심한 남자에게 마음을 줘버린 걸까. 무뚝뚝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정환은 사랑 앞에선 늘 결정적인 순간에 주춤한다. 술김에 혹은 장난으로 스치듯 마음을 전해본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터. 부작용이라면 용기 없는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는 씁쓸함이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고백만큼 귀한 건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비록 장난이라며 웃어넘겼다 해도.
글=황혜민 기자 hiro1005@joongang.co.kr


어려운 사람에겐 늘 따뜻한 남자, 성동일
기사 이미지

어떤 장면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동일(성동일)에게 껌 파는 할머니가 다가온다. 동일은 “오늘은 됐어라” 하며 외면하다가 지갑을 꺼내며 “오늘이 마지막이어라. 이제 더 이상 못 팔아 드려”라며 지폐 한 장을 할머니 손에 쥐어준다.

이래서 꽂혔다
요즘처럼 살기 팍팍한 시대, 동일 같은 사람이 간절해서였을까. 이 장면을 보며 마음이 찡했다. 반 지하 집에 살면서, 아내한테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늘 구박받는 신세지만, 동일은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는 늘 따뜻하다. 퇴근길에 동네 할머니가 팔다 남은 나물을 모조리 사 오는 게 일상 다반사다. 심지어 태교 음악 테이프까지 사와 아내의 화를 돋우던 그가 아니던가. 이 드라마는 우리가 잊고 사는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글=지용진 기자 windbreak6@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