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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변절자에겐 철추 내릴 것” 서슬 퍼런 공포정치 메시지

중앙일보 2016.01.30 01:28 종합 1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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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4년 12월 수산 부문 공로자들에게 연설하는 모습. 연설 내용은 곧바로 당의 정책에 반영되며 간부들의 행동 지침이 된다. [노동신문]


“닭알(달걀)에도 사상을 재우면(주입하면) 바위를 깰 수 있다.”

북한 간부들 생존 필독서 『김정은 명언집』 단독 입수


 북한 노동신문이 지난주 소개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언급이다. 신문은 이를 “명언 중에 명언”이라고 치켜세웠다.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의 비범한 영도예술에서 정수를 이루는 건 사상만능론”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북한 체제에선 최고지도자의 말은 곧 명언이 되고 통치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평양의 고위 간부들은 요즘 김정은의 명언에 빠져 있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도 『김정은 명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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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표지의 핸드북 형태(15㎝X10㎝)인 이 책은 지난해 5월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이 명언집엔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들이 따라야 할 행동지침이 빼곡하게 담겼다. 32세 젊은 지도자의 생각과 통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그야말로 필독서인 셈이다.

 절대권력을 거머쥔 김정은의 말인 만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대목도 있다.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에 도전하는 분파 행위와 사상적 배신자들의 종착점은 반당·반혁명”이라는 구절은 2013년 12월의 장성택 처형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이는 김정은이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처형한 지 두 달 뒤 열린 노동당 사상일꾼대회에서 언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모부까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김정은이 다른 당과 군부 핵심 간부들을 향해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게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들의 해석이다.

 “백두의 칼바람은 혁명의 배신자·변절자들에겐 돌풍이 돼 철추(철퇴)를 내릴 것”이라는 말도 소개됐다. ‘백두의 칼바람’이란 표현은 김정은이 2년 전 백두산에 올라 처음 입 밖에 냈다.

장성택 처형 한 달 전 측근들과 백두산 삼지연을 찾아 결심을 굳힌 점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이 간부들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짐작이 간다.

 명언집에는 김정은의 공개 발언이나 ‘노작’(연설 및 서한)에서 발췌한 말들이 집약돼 있다. 간명한 말이지만 김정은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겼다. 곳곳에서 ‘종파’나 ‘분파 행위’ 등의 단어도 눈에 띈다.

충신이나 간신 같은, 요즘은 좀처럼 접하기 힘든 표현도 등장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왕조체제에서나 쓸 법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북한의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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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김정은을 수행하는 간부들은 손에서 수첩을 놓질 못한다. [노동신문]


 정부 관계당국에 따르면 지난 4년간 100여 명의 당·정·군 간부가 처형 또는 숙청됐다. 회의 석상에서 졸거나 말대꾸를 하다가 해임·강등되거나 추방되기도 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김정은의 지시사항을 메모만 하다 보니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자조 섞인 말도 등장했다.

서울의 북한 전문가들은 이를 평양판 ‘적자생존’이라 부른다. 김정은의 컨디션에 따라 운명의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는 노동당과 군부 간부들에겐 ‘말씀이 곧 생명’이다.

이를 단순한 지시사항으로만 여기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고 생존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처세술을 터득해야 한다.

  김정은은 “조국의 부름 앞에 한 몸을 내대라(내밀어 가까이 대라)”며 수령을 향한 충성을 강조한다. 이 책에 수 차례 강조된 ‘애국심’은 결국 자신에 대한 충성에 방점을 찍었다.

 명언들은 중앙당의 결정에 따라 각 지방과 협동농장 및 공장·기업소에 전파된다. 노동자와 학생·주민들에겐 행동 지침이 되는 것이다. 지역별로 ‘명언 학습’이 진행되고 관영매체로 되풀이함으로써 세뇌시킨다. 하지만 모든 명언이 김정은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노동당 내에 전담 파트가 있고, 수시로 명언 공모전이 열리기도 한다”며 “김정은이 실제로 한 말이 얼마나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 우상화와 체제 선전을 담당하는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각 지역 선전·선동원들을 통해 김정은의 명언을 창작해낸다는 뜻이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명언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든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만들어내고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연설에서 ‘인민’을 97차례 외쳤다. 북한은 “애민(愛民)정신의 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만큼 민심 이반을 걱정한다는 얘기도 된다.

명언집에 “대중적 기반이 없는 당은 바람 앞에 선 촛불과 같다”는 발언이 담긴 것도 이런 위기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핵과 관련한 언급이 두드러지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강위력한 핵 무력 위에 평화도 조국의 부강번영도 있다”는 말은 네 차례의 핵 실험과 핵 보유국 주장을 강성국가 건설 구호와 연결시키려는 의도와 맥이 닿아 있다. “군력(軍力)을 백방으로 강화하는 길에 강성국가와 인민의 안녕·행복이 있다”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집권 5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체제의 아킬레스건은 경제다.

 5월 초 노동당 7차 대회 개최를 앞뒀지만 경제개발 청사진을 제시할 뒷심이 부족한 상태다. 이런 상황은 명언집에도 드러난다. “아껴야 잘 산다” 식 교시들을 수 차례 반복하는 수준에 그칠 뿐 비전은 없다. “절약은 곧 생산이며 애국심의 발현”이라거나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는 강물도 쓰면 줄어든다”는 말도 그렇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당 대회를 앞두고 특히 경제 부문에서는 보여줄 게 마땅치 않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술을 통치수단으로만 여기는 북한 체제의 특성도 나타난다. 김정은은 “혁명과 인연이 없는 예술, 순수 예술을 위한 예술은 필요없다”며 예술의 범위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었다. 주민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만 허용하겠다는 말이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노래폭탄을 싣고 달리는 모란봉 악단(김정은이 만든 ‘걸그룹’)은 김정은식 음악정치의 선봉대”라고 주장한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영화를 체제 유지에 활용했던 것과 비교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후 영화 제작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전했다.

 93쪽 분량에 433개의 발언이 담긴 이 명언집은 ▶수령·당·대중 ▶사상과 이론 ▶정치·군대와 국방 등 9개 분야로 짜였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김정은의 생각은 물론 북한 체제가 당면한 고민거리를 보여준다. 김정은 체제의 미래를 전망해 보는 자료로서도 유용하다.

통일부 당국자는 “김정일 시대엔 집권 4년 차인 1997년부터 명언 학습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정은 명언집 발간은 ‘명언’을 내세운 김정은 우상화와 학습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얘기다.


[S Box] 김일성 “천 삽 뜨고 허리 펴자” 김정일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북한은 구호(口號)가 지배하는 나라다. 거리와 학교·공장·기업소는 물론 최전방 지역에도 선전 구호판이 서 있다. 그중 상당수는 김일성과 김정일·김정은의 어록이 다. 여러 발언 중에서 특출한 내용은 ‘명언’급으로 올라선다.

김일성 통치 시기에는 경제 건설과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천 삽 뜨고 허리 펴기 운동’이나 ‘새벽별 보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경제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할 때 나온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언이라고 북한에서 소개한다.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부실공사가 이어지자 ‘천년을 책임지고 만년을 보증하자’는 말도 등장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좀 더 직설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보인다. ‘마식령 속도’나 ‘단숨에!’ 같은 구호다. 핸드북 형태의 간편한 책으로 ‘명언’을 학습하도록 하는 점도 특이하다. 과거엔 『김일성 저작선집』이나 『김정일 선집』처럼 여러 연설·서한을 모은 책을 활용했다.

강인덕(전 통일부 장관) 경남대 석좌교수는 “가독성을 높여 자연스레 반복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말대사전』(2006년판)은 ‘명언’을 “함축되고 세련된 언어수단으로 생활적 진리 또는 교양적이며 교훈적 내용을 담은 유명한 표현이나 문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서재준 기자 suh.jaej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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