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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후련하네요, 아들 중필이도 이젠 마음을 놓겠죠"

중앙일보 2016.01.30 01:04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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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패터슨


눈동자가 촉촉히 젖었다. 숱하게 경찰서·검찰청·법원을 찾아다니면서도 한 차례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선고 공판 직후 몰려든 취재진에게 심경을 밝힐 때였다.

[뉴스 속으로] ‘이태원 살인사건’ 피살 대학생 어머니의 한 맺힌 19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항상 중필이한테 미안하고 죄짓는 것 같았어요. 죽은 사람은 말도 못하는데 산 사람이 풀어야 된다 생각하고 독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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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 징역 20년…피살 대학생 어머니의 눈물 서울중앙지법은 29일 ‘이태원 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된 미국인 아서 패터슨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사건 발생 18년9개월 만이다. 피해자 조중필씨의 어머니 이복수씨(가운데)는 판결 뒤 “중필이가 이제 마음을 놓을 것 같다”고 심정을 밝혔다. [사진 김현동 기자]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사형시켰으면 속이 시원한데 법이 그러니까 따를 수밖에 없죠. 우리 생각에는 두 놈이 똑같이 징역살이 해야 되는데 안타까워요. 그래도 19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살인범을 데려와서 벌을 줬으니까 이제 중필이가 마음을 놓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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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필씨가 좋아한 것은 엄마와의 여행이었다. 어머니 이복수씨와 산책 중인 장면, 1996년 제대 직후 여행지에서의 모습, 고교 수학여행 때의 앳된 얼굴 등이 사진(위에서부터)으로 남아 있다. [사진 이복수씨]

 ‘이태원 살인사건’ 피해자 조중필(당시 22세·홍익대 전파공학과 휴학생)씨의 어머니 이복수(74)씨. 그의 악몽 같은 세월은 1997년 4월 3일에 시작됐다. 3녀1남의 막내 중필씨가 서울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그날이다.

범인은 화장실에 함께 있었던 미국인 아서 패터슨(당시 18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8세) 둘 중 한 명. 98년 진범인 줄 알았던 리가 무죄로 풀려났다. 패터슨은 이듬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검찰의 재수사로 진범 가능성이 제기된 패터슨을 다시 법정에 세우기까지는 20년 가까이 필요했다. 법원은 29일 그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관련기사 “옷의 피가 증거” 패터슨 20년형 선고에 19년 걸렸다

 이씨는 선고 전날인 28일 서울 삼선동 집에서 본지에 그간의 소회를 풀어놨다. “이제 지나간 일들은 깜빡깜빡한다”던 이씨는 아들 중필씨와 관련된 일은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특히 사건이 벌어졌던 ‘그날’은 어제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온다’며 집을 나섰던 아이가 저녁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밤 10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순천향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아빠 몰래 차를 몰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라도 났나’ 해서 주차장을 살펴봤는데 차는 주차장에 그대로 있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경찰이 ‘아빠만 들어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중필이는 눈을 뜨고 죽었다고 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 첫 수사 때 가장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부검을 맡길 걸 그랬다. 담당 검사가 ‘자기가 아는 의사가 있다’며 부검을 서둘렀다. 정신도 없고 검사가 하자니까 시키는 대로 했다. 부검의가 처음에는 몸집이 큰 애(리)가 범인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작은 애(패터슨)도 범인일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그때부터 불안했다. 그러고 나서 검사가 ‘물어볼 것이 있으면 오라’고 해서 찾아갔다. 낮 2시인데 술에 취해 있었다. 혀가 꼬부라져 자기 혼자 ‘중필이가 불쌍하다’며 울었다. 책상에 눈물·콧물 닦은 휴지만 수북이 쌓였다. 우리는 궁금한 게 있는데 묻지도 못했다. 같이 간 중필이 친구가 ‘사법고시 패스했는데 잘하겠죠’라고 해서 믿었는데….”

 - 결국 에드워드 리가 무죄로 풀려났다.

 “그가 무죄 판결을 받을 때 순간 아무런 생각도 안 났다. ‘범인은 누군가, 이런 법도 있나’라는 생각에 기운이 다 빠져 항의도 못했다. 한 놈은 무죄로, 한 놈은 잠깐 감옥에 있다 풀려났다. 그럼 우리 아들은 누가 죽인 건가. 법정에서 나오는데 에드워드 리의 아빠가 밖에서 ‘거봐요 우리 아들이 안 죽였잖아요. 우리 아들은 마약은 해도 사람은 안 죽였어요’라고 하더라.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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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 혐의로 기소된 리는 98년 10월 서울고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증거 인멸 혐의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던 패터슨은 형집행정지 기간에 검찰의 실수로 출국정지 조치가 풀려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중필씨 가족들은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수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씨는 미국에 있는 패터슨을 국내로 데려와 달라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집회 시위 현장, 지방대학, 주부들을 위한 노래교실까지 찾아갔다.

2007년부터 4년 동안 탄원서 6000여 장을 모아 검찰에 제출했다.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렸다. 중필씨의 매형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씨를 도왔다.

 - 99년 패터슨이 출국한 이후 2009년 재수사와 지난해 패터슨 송환이 성사되기까지 10년이 걸렸는데.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아들 이야기를 다루면서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재수사를 맡았던 박철완(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소속) 검사가 전화로 ‘패터슨을 데려오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패터슨 입국 때는 몸이 덜덜 떨려 공항에 안 갔는데 지금은 약간 후회가 된다. 법정에선 눈앞에 있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그때 가서 물이라도 끼얹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재판이 재개된 이후로 법정에 꼬박꼬박 출석했다.

 “이틀은 너무 어지러워 약을 먹고 누워 있었고 나머지 재판은 전부 참석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법정 문을 열 때마다 하는 생각은 ‘판사님이 제대로 벌주실까. 많이 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것뿐이었다. 최후진술(1월 14일) 때는 우황청심환 두 개를 먹었는데도 패터슨 옆에 가니까 떨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씨 기억 속의 중필씨는 ‘착한 막내아들’이었다. 딸만 셋을 낳은 후 얻은 아들이었다. 이씨는 여행을 좋아했던 중필씨가 수능 시험이 끝나고 “벚꽃을 보러 진해로 가자”고 했는데 집안일로 못 갔던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군 제대 후에도 벚꽃 구경을 가자고 졸랐지만 당시 이씨의 허리 통증이 심해 가지 못했다. ‘멀리는 못 가도 가까운 데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사고가 나면서 소원을 영영 들어줄 수가 없게 됐다.

이씨는 아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다 한동안 눈을 감았다. 19년의 세월도 사무친 그리움의 고통을 줄이지는 못한 듯했다.

 “지금이라도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고 그래요. 그런데 요새는 꿈에도 통 안 나오네요.”

글=정혁준·이유정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사진=김현동 기자


[S Box] 사건 현장 햄버거 가게 이전, 변호사 된 담당 검사 “다 잊었다”

19년은 강산이 두 번 바뀔 수 있는 시간이다. 1997년 참혹한 살인이 일어난 서울 이태원동의 햄버거 가게는 10년 뒤 그 자리를 떴다. 계약 기간이 만료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 가게가 있던 건물은 완전히 리모델링됐다.

사건 현장인 1층 화장실도 사라졌다. 1층의 패스트푸드점이나 4층의 클럽 대신 새 건물에는 다양한 업종의 점포가 자리를 잡았다. 근처에는 사건 당시엔 없던 지하철역도 들어섰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부터 에드워드 리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던 검사까지 관련자들의 신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신고를 접수한 미군범죄수사대(CID)와 함께 초동 수사를 벌였던 김락권 당시 서울 용산경찰서 강력계 형사는 2013년 3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비운의 사고만 없었다면 최근의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수사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2011년에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볼 때 살인범은 패터슨이 맞고 리 역시 공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검찰에 제시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서울중앙지검 박모(57) 검사가 리에 대해서만 살인 혐의로 기소한 것에 의문과 아쉬움을 표현했다.

박 전 검사는 2000년에 검찰을 떠났다. 리가 무죄 판결을 받은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최선을 다한 사건이었는데 무죄 선고가 났다. 검사로서 회의를 느낀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고향인 전북의 한 도시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29일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그 사건 다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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